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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판 - 억울한 사형수들 [사형제폐지]

길찾기91 2020. 12. 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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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판 - 억울한 사형수들>

 

 

1. 오판이 확인된 사건

 

 

1)최창식 대령의 처형

 

최창식 대령은 6·25 당시 한강교 폭파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는데, 총살 당한지 14년 후에야 유족이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로 번복되었다.

 

2)경주 당구장 주인 살해사건

 

경북 경주시 황오동 국일 당구장 여주인 피살사건인데 피살된 여주인과 잘 알고 지낸 당시 영양경찰서 입암 지서장 박호영씨(당시 45)가 진범으로 지목, 구속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12개월이 옥살이를 하다가 살인 진범 3명이 붙잡혔기 때문에 845월 대법원 무죄 판결로 풀려나고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되었다. 다른 2명도 공범으로 몰려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진범들은 1983114일 오전 3시쯤 경주시 황오동 233 국일 당구장 내실에 침입하여 잠자고 있던 주인 이경순씨(당시 37)를 목졸라 살해하고 백금 다이어반지 1(15만원 상당)와 현금 33천원을 털어 달아났었다는 것이다.

 

진범

** (30, 특가법 위반 구속)

** (27, 횡령죄로 제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 (30, 절도죄로 경북 청송 제2감호소에 수감 중이었음.)

 

 

3)아내를 독살한 혐의로 무기 구형에서 무죄 선고

 

경남 마산지방법원 합의부는 1986. 11. 15. 부부싸움을 하다가 아내의 목을 조르고 극약을 먹여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허**(42, 의창군)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추측에 의한 범행 사실은 증명력을 가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4)김기웅 순경의 살인누명

 

신림동 청수장 여관 여인 살인사건에 현직 순경이 살인범으로 몰려 1심과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 중에 살인 진범이 사건 1년만에 붙잡혀 누명을 벗게 된 사건이다. 9211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청수장 여관 이모양(당시 18. 술집여종업원)피살 사건의 진범 서모군(19세 재수생)이 붙잡혔다. 이에 따라 김기웅 순경(27, 관악경찰서. )은 풀려났다.

진범 서군은 고교졸업 후 가출하여 사건 당일 921129일 오전 730분쯤 잠자기 위해 여관에 들어가 우연히 이양의 방에 들어갔으나 핸드백을 훔치려는 순간 이양이 소리를 질러 살해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당시 김순경은 오전 330분쯤 이양과 함께 투숙했다가 오전 7시쯤 여관을 나가 근무하고 10시쯤 돌아와 이양이 숨진 사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었다.

김기웅 순경은 수사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폭로하였다. 이 사건은 판·검사, 경찰 모두가 정황증거만을 과신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관행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김씨는 당시 동료 경찰관들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혐의를 벗기 어렵다. 자백을 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하자 이에 못 이겨 시인하고 말았다고 했다.

 

 

5)부산 만덕 국민학생 강주영양 살해사건과 무죄선고

 

19941010일의 강주영양(9) 살인사건과 관련 구속·기소된 피고인 4명중 3명에게 95224일 오전에 부산지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주범으로 지목돼 구속·기소된 원**(24), 공범 옥**(27), **(19D여전 비서과) 피고인 등 3명은 살인누명을 벗었고 죽은 강양의 이종사촌 언니이자 앞의 3명과 함께 범행을 했다고 최후 진술 때까지 주장했던 이**(19, ) 피고인에게는 살인죄를 적용, 이례적으로 검찰의 구형(무기형)보다 높은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137일만에 제1심이 모두 끝났다.

결국 검·경 실적위주의 짜맞추기식 수사였음이 드러났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흉악범으로 몰아 공소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지적했다.

 

 

6)고물상 청년 살인 혐의, 2심서 무죄 선고

 

1993227일 새벽 고물상 청년이 서울 성동구 화양동 광장오락실 관리인 최종수씨를 살해한 뒤에 1백여 만원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항소한 김**(당시 30)에 대한 무죄가 선고되었고 누명을 벗고 석방되었다.

 

재판부는 김씨가 최씨를 살해할 때 사용했다고 경찰이 제시한 못 빼는 연장이 김씨의 옷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김씨의 자백진술이 경찰의 가혹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2. 국가보안법에 의해 간첩죄로 구속되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처형된 사건

 

1)김진모씨(193941일생)

 

당시 형은 모국민학교 교장, 부인은 모국민학교 교사였음.

학력은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의대 졸업. 김진모씨는 서독에서 의사생활 4년을 경험하였고, 당시 서독 의사협회에서 보내는 소련 모스크바 회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사상을 떠나 이북사람들을 2회 만나 대화한 사실이 있었는데, 당시 국적이 한국이었기 때문에 한국대사관에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 822월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등에서 특강도 하며 머무르고 있다가 동년 4월에 간첩죄명으로 구속, 1986527()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김진모씨는 자기는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그는 사형장에서 유언 시에 "저는 국가보안법으로 갑니다마는 제 마음은 이 국가에 충성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 위정자와 88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며 처형대에 서겠습니다."라고 했다.

 

 

3. 정적 제거 수단으로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사건

 

1)죽산 조봉암

 

1959731일 오전 113분 서울형무소(서대문구치소)에서 간첩죄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진보당의 돈줄로 알려진 양명산은 이틀 전인 729일하오 34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양명산이라는 간첩이 조봉암씨에게 4천만달러를 전달했다는 내용으로 구속되었으나 구속 16개월만에 '간첩'이란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서울지방법원 제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되었고,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에 대법원에서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고, 18시간만에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죽산은 유언에서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잇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 없다. 나는 이승만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며 형장의 목사에게 성경 누가복음 23:22-23절 말씀을 읽어 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2) 8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인혁당 사건

 

1964년 봄 "대일 굴욕외교"인 한일회담을 규탄하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 박정희 정권은 6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에 두달 뒤 "인민혁명당이 국가의 전복을 꾀하려 했다"는 발표를 하고 이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피의자 모두가 고문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 했고, "인혁당"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이들 8명은 74427일 긴급조치 1-4호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및 내란 예비 음모, 내란 선동 혐의로 기소되어 7478일과 97일 비상 보통 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7549일 서울구치소에서 하재완, 이수병 등 여덟 명의 젊은이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고 사형언도를 받은 지 20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인혁당 사건을 두고 강신옥 변호사는 "마치 중세기의 마녀재판이나 다름없는 터무니없는 부끄러운 재판"이었다고 말했으며, 김대중씨도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 중에 "사형제도가 없었더라면 인혁당 사건으로 관계된 분들이 지금쯤은 거리를 활보할 것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4. 일반 사형수 중에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처형된 사건

 

1)"오판한 판·검사와 위증자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고 간 사형수

 

최은수씨는 1980811일 새벽 330분쯤 경기도 안성읍에 있는 안성군 농협 사무실로 들어가 2명의 숙직 직원을 카빈으로 쏘아 죽이고 금고를 털려다가 달아난 혐의로 1981922일에 법원 상고 기각 판결을 받고 사형이 확정되었고 19851031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최씨는 경찰과 검찰에서는 범행을 할 수 없이 시인했으나 재판장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1심부터 계속 부인했고 형 확정 뒤에도 재심청구를 되풀이했었다. 198412월엔 서울변호사협회가 법률 구조사업의 하나로 김병헌 변호사를 통해 최씨에 대한 재심청구를 맡고 나섰으나, 구명운동 중 처형되었다.

그는 사형장에서 "오판한 판·검사와 위증자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처형되었다.

 

 

2)치정 살인범으로 처형된 억울한 오휘웅씨(당시 34, 미혼) 사건

 

 

오씨는 원래 일연 정종의 포교사였고 집안이 독실한 일연 정종 교도였다.

1974830일 밤 1040분경 인천에서 평소 정을 통해온 신흥동 모 쌀가게 주인 두이분씨(당시 28)란 유부녀의 교사를 받아 두씨의 남편과 두 아들을 목졸라 죽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1976224일 대법원의 사형이 확정되어 1979913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되었다.

오씨는 재판정에서 살인 범행을 부인했다. 변호사들은 두씨의 단독 범행이며 두씨가 오씨를 물고 들어간 것이라는 쪽으로 변론했다. 증언에서 오씨는 검·경찰의 고문에 의해서 자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이분씨의 증언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는데, 두씨는 1심 재판 중 교도소에서 자살하고 말았기 때문에 결국 억울하게 처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오씨는 유언에서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도록 해 주십시오. 여기 검사, 판사도 나와 있지만(사실은 검사는 집행장에 나오지만 판사는 안 나옴.)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3)기타 억울함을 호소하며 처형된 사건들

 

(1)이팔국씨

 

이팔국씨는 아내가 자녀를 두고 죽은 뒤 1973년 내연의 처와 동거했다. 1975626일 동대문서에 구속되었는데 내연의 처를 토막 살해한 혐의이다. 처가 이혼을 하자고 하여 머리채를 잡아당겨 쓰러뜨린 것이 머리를 다쳐 기절하자 응급조치를 취하고 살리려고 했으나 죽고 말았다. 전에도 정신이상의 경험이 있었다는 이씨는 정신없이 자기도 충격으로 쓰러져 있다가 깨어나 보니 시체가 없어져서 동대문서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살인죄는 지었으나 토막살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억울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2)경신고등학교 숙직실 강도 살인사건

 

1974515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경신고등학교 숙직실 e강도 살인사건의 공범인 배석기씨(당시 31)"나는 주범이 아니다.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 사형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유언하고 침착하게 죽었다고 한다.

경신고교 청소부 배씨는 주범 김모씨와 함께 교정에 들어가긴 했으나 김씨 혼자 숙직실에 들어가 범행을 했고 자기는 벤치에서 술만 마시고 잠만 잤다고 했다. 주범 김씨가 잡히기 전에 배씨가 처형된 사건이다.

 

 

(3)5명의 처녀 윤간 및 강간살인죄명의 이필환씨(당시 41)

 

1993630일 형확정.

1994106일 서울구치소에서 종교의식 없이 처형되었다.

최후 유언에서 "주범이 혼자 살인을 했고 나는 안 죽였다고 했는데..."라고 원한을 품고 말했으며 "우리 나라 법은 개판이다. 돈 없으면 안 했어도 죽인다"라고 했다.

 

 

문장식 편, 사형·오판(살인사건) - 사형제도폐지운동자료집(),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인권위원회, pp. 62-66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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