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이야기
스탈린, 소련을 굶주림에 빠뜨리다 - <피에 젖은 땅> 티머시 스나이더, 글항아리
길찾기91
2023. 11. 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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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스탈린, 소련을 굶주림에 빠뜨리다” 중 일부
1933년은 서방 세계 전체가 굶주린 해였다. 미국과 유럽 도시의 길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남녀가 넘쳐났고, 그들은 배식을 받으러 줄을 서는 일에 익숙해졌다. 진취적인 웨일스 출신의 청년 저널리스트인 개러스 존스는 베를린에서 실직한 독일인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러 모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뉴욕에서는 3년간의 대공황 시기에 미국 노동자들이 보인 무력함에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빈민이 한 줄로 늘어선 모습을 봤다. 한때는 근사했을 옷을 입은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샌드위치 두 개, 도넛 하나, 커피 한 잔, 담배 한 개피를 받으러 기다리는 중이었다" 3월에 존스가 방문한 모스크바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굶주림은 축하할 일이었다. 대공황은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전조처럼 보였다. 스탈린과 그의 동지들은 자신들이 소련에 구축한 체제의 필연적인 승리를 자랑했다.
하지만 1933년은 소비에트 도시, 그중에서도 특히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굶주린 한 해였다. 우크라이나 도시인 하리코프, 키예프, 스달리노,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서는 수십만 명이 매일 빵 한 덩어리를 얻으려고 기다리곤 했다. 공화국의 수도인 하리코프에서도 존스는 또 다른 빈곤의 참상을 목격했다.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가게 앞에 새벽 2시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평균 4만 명이 빵을 받으러 대기했다. 줄을 선 사람은 자리를 지키고 싶은 나머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허리띠를 붙잡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굶주림 때문에 너무 약해져서 낯선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는 서 있지도 못했다. 기다림은 온종일 계속되었고, 이틀이 걸릴 때도 있었다. 임신부와 상이용사들은 남들보다 먼저 물건을 살 권리를 빼앗긴 채 뭔가를 먹으려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간혹 대기열에 있던 한 여성 흐느끼면 울음소리가 줄을 따라 울려 퍼져, 수천 명이, 원초적 공를 느끼는 한 마리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곤 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시민들은 배급 대기열의 자리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들은 도시가 유일한 영양 공급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는 지난 5년 동안 급성장했고, 도시에 진입한 농민은 노동자와 점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부의 자녀는 훨씬 더 오랫동안 도시에서 거주한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함께 가게에서 얻은 음식에 의존해야 했다. 시골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굶주림의 시기에는 도시 거주자가 시골에 의존한다. 독일과 미국에서 농민은 대공황 시대에도 굶주리지 않았다. 도시의 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는 사과를 팔거나 사과를 훔쳐야 했지만, 알테스란트나 아이오와에는 언제나 과수원, 곡식 저장고, 식품 저장실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도시 거주자는 갈 곳이 없었고, 농장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배급권을 제시해야 빵을 얻을 수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가 그들의 생존 확률을 결정지었고, 도시 거주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증거는 도처에 있었다. 굶주리는 농민들은 배급 대기열 주위에서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애걸했다. 어느 마을에서는 15세 소녀가 대기열 맨 앞까지 가며 호소했지만 가게 주인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대기열에 서 있던 도시 주부들은 농촌 주부들이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매일 등하교하는 여자아이는 아침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저녁에는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을 봤다. 한 젊은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본 농민 아이를 '뼈만 남아 있었다'고 묘사했다. 산업도시인 스탈리노에 살던 한 당원은 뒷문에서 굶어 죽은 시체들을 발견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공원을 산책하는 연인은 무덤을 파헤치지 말라는 경고문을 봐야 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병원에 도착한 굶주린 사람들을 치료해선 안 됐다(음식 제공도 금지였다. 시 경찰은 굶어 죽은 거리의 부랑자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경찰은 하루에 아이 수백 명을 체포했다. 1933년 초반 하리코프 경찰이 매일 달성해야 하는 할당량은 2000명에 달했다. 하리코프의 수용소에서는 언제나 약 2만 명의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최소한 밖에도 굶어 죽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편히 죽게 해주세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고 싶진 않아요.”
굶주림은 서방 세계의 어느 도시보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도시에서 훨씬 더 심각했다. 1933년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도시 거주자 수만 명이 실제로 굶어 죽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죽거나 죽어가던 사람은 태반이 농민, 즉 노동력을 써서 도시에 빵을 공급하던 이들이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들은 살아 있었지만 교외 지역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통념과 달리, 도시 거주자는 음식을 찾으러 농촌을 떠난 농민들의 궁핍한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드네프로페트롭스크의 기차에는 너무 허약해서 구걸조차 못 하는 농민이 넘쳐났다. 기차를 탄 개러스 존스는 빵을 조금 얻었지만 다시 경찰에게 압수당한 농민을 만났다. “그들이 제 빵을 빼앗아갔어요"라는 말만 되뇌던 농민은 굶주리는 가족에게 실망을 안겼음을 뼈아파했다. 스탈리노 기차역에서는 한 굶주리던 농민이 기차 앞으로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산업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제정 시대에 존 휴스가 세웠는데, 그는 웨일스 출신 기업가이자 개러스 존스 어머니의 상사이기도 했다. 도시 이름은 예전에는 휴스의 이름을 땄지만, 나중에는 스탈린의 이름을 땄다(1961년 이후 도네츠크라고 부른다)."
1932년에 완료된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은 대중의 빈곤을 대가로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철도 옆에서 죽은 농민은 이렇게 대조적인 현상의 참담한 증인이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열차 탑승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끔찍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배고픈 농민들은 도시에 가려고 철로를 따라 나섰지만, 쇠약해진 나머지 철로 위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하르트시즈스크에서는 기차역에서 쫓겨난 농민이 근처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맸다. 소련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고향인 베르디체프에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객실 유리창 너머에서 빵을 구걸하는 여인을 만났다. 사회주의 건설을 돕고자 소련에 온 정치적 망명자 아서 케스틀러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한 회상에 따르면, 하리코프 기차역 밖에는 여자 농민들이 "머리는 심하게 흔들리고, 사지는 막대기 같고, 배는 부풀고 튀어나온 소름 끼치는 아기를 차창 쪽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술병에서 꺼낸 배아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21세기의 도덕적 목격자로 인정받는 이 두 사람이 직접 목격한 내용을 글로 적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시 거주자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농민의 모습에 익숙했다. 1933년, 농민들은 익숙한 도시 시장으로 향했지만, 이제는 물건을 파는 대신 구걸을 해야 했다. 상품도 손님도 없는 시장 광장에는 애오라지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 들리는 소리는 한때는 옷이었던 넝마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죽어가는 이들의 희미한 숨소리뿐이었다. 어느 봄날 아침, 하리코프 시장의 농민 시체 무덤 사이에서 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는데, 엄마의 얼굴은 생기 없는 회색빛이 된 지 오래였다. 행인들은 저마다 이 광경을 지켜봤는데, 너부러진 시체나 죽은 엄마와 산 아기는 물론 현장의 모습, 즉 작은 입과 마지막 모유 몇 방울, 차가운 젖꼭지가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가리키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현장을 지나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게 사회주의의 봄이야. 그 꽃망울 말이야.”
<피에 젖은 땅> 티머시 스나이더, 글항아리, 2022, 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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