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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 행동이 진화한 이유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길찾기91
2023. 12. 2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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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 행동이 진화한 이유
이타 행동이 진화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생물학의 오래된 숙제다. 다윈을 비롯해 여러 생물학자들이 갖가지 이론을 내놓았지만 아직 완전하게 해명하지는 못했다. 개체의 이타행동은 자연선택 이론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타 행동을 유발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는 자손을 남길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자연선택은 그런 형질을 제거한다. 그런데도 동물의 이타 행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동물일수록 더 다양한 이타 행동을 한다. 『종의 기원』 출간 이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그럴듯한 이론이 나왔다. 영국 생물학자 해밀턴Wiliam Hamilton(1936~2000)의'포괄적응도'包括適應度(inclusive fitness)이론이다. 1960년대 생물학 전문 학술지에 발표한 해밀턴의 논문은 수학 공식이 난무하기 때문에 문과는 독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를 쓴 다른 학자의 해설을 가져왔다.
개미는 암수 결정 방식이 특이하다. 생물은 보통 염색체수가 2n개인 '두배수체'diploid다. 그런데 개미 수컷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에서 나오기 때문에 염색체수가 n개인 '홑배수체'haploid다. 어미 염색체 2n개의 절반만 가지고 있다. 반면 수정란에서 태어나는 암컷은 어미와 아비한테서 받은 유전자를 다 지니고 있다. 여왕개미가 수컷 한 마리와 교미해서 받은 정액을 보관해 두고 계속해서 난자를 수정한다고 하자. 이 경우 딸들은 75퍼센트 확률로 유전자를 공유한다. 계산 방법은 간단하다. 아비의 염색체는 원래 n개뿐이어서 모든 딸이 똑같은 것을 받는다. 딸들의 유전자는 일단 절반 완벽하게 동일하다. 여왕개미의 유전자는 염색체 감수 분열을 통해 절반만 딸에게 넘어간다. 딸들이 모계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퍼센트다. 절반인 아비 유전자는 모두 같고 나머지 절반인 어미 유전자는 50퍼센트 확률로 공유하니 자매 개미들의 평균 유전 연관도는 75퍼센트가 된다. 양성생식을 하는 다른 종의 형제자매 유전 연관도 50퍼센트보다 높다.
해밀턴은 이 사실로 개미의 이타 행동을 설명했다. 일꾼 개미가 자신의 번식을 포기하고 여왕개미의 출산과 양육을 돕는 '친족이타주의 행동을 함으로써 직접 짝을 찾고 자식을 낳는 경우보다 가족의 고유한 유전자 세트가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개미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유전적 우연으로 생긴 본능 행동이 가족의 고유한 유전자 세트의 생존 확률을 높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친족이타주의‘ 행동을 하는 개미 집단이 번성했다는 이야기다. 생물학자는 이것을 '개미 집단에서 친족이타주의 행동이 진화했다'고 표현한다.
개미의 이타 행동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이론이라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해밀턴의 접근법은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의 이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이다. 인간이 개미와 같다는 게 아니다. 그런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 수컷은 '홑배수체'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들은 없다. 출산만 하는 암컷도 없다. 일꾼개미나 여왕개미처럼 사는 걸 누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의 친족이타주의는 개미 못지않게 강력하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동물이 자식을 낳는다. 자식을 먹이려 고된 노동을 하고 자식을 보호하려고 죽을 위험도 감수한다. 도대체 왜? 본능이라는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왜 그런 본능을 가지게 되었는지 해명해야 한다. 열쇠는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쥐고 있다.
해밀턴 모델은 이타 행동이 가족과 친족 안에서 먼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절반씩 지니고 있다. 자신의 유전자를 자식만큼 많이 가진 개체는 세상에 없다. 부모한테는 자식이 자신만큼 소중하다. 형제자매의 유전 연관도는 50퍼센트 사촌끼리는 12.5퍼센트다. 인간의 이타 행동은 유전 연관도가 높은 부모자식과 형제자매에서 시작해 가까운 친족과 먼 친척으로 퍼져 나간다. 이것이 가족주의 또는 혈연의식이라고 하는 의식과 감정의 생물학적 유전학적 기초다. 친족이타주의가 오로지 유전자 때문에 생긴다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상호 의존, 접촉의 밀도와 빈도, 공동의 경험, 공유하는 기억 등 인문학 이론으로도 친족이타주의가 생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생물학과 인문학의 이론을 결합하면 친족이타주의가 생긴 이유를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다. 혈연에 근거를 둔 비합리적 연고주의와 부정부패를 없애기가 왜 그토록 어려운지도 알 수 있다.
다시 맹자를 생각한다. 해밀턴의 이론은 맹자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보편적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는 이타 행동의 범위는, 가족에서 시작해 이웃으로 넓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이 인정하는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라고 해서 훌륭한 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애쓰는 것은 아름답다. 우리 삶에는 미학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 귿로 알면서 선솨 미를 추구하자. 사실을 도덕적으로 착각하지도 말고 도덕으로사실을 덮지도 말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맹자는 과학적으로 옳은 견해를 폈지만 묵가와 양주학파를 부적절하고 과도하게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돌베개, 2023, 15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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