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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모자 장수의 시대 -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 올든 워커
길찾기91
2024. 4. 2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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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모자 장수의 시대
1857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61세 모자 제조업자가 수은이 든 모자 제조용 용액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남성용 펠트 모자를 만들면서 수은 증기를 들이마셨고, 갈라진 맨손을 통해 수은 용액에 중독되었다. 주위 동료들의 검게 변한 이빨, 부어오른 혀, 떨리는 손 등을 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을 느껴서인지, 심각한 우울증과 기분 변화가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인지, 자살의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앨리슨 매슈스 데이비드는 2015년 출간한 《패션의 흑역사》에서 모자공의 죽음은 업계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고 썼다. 당시 유럽인들은 수은이 유독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부 관료, 의사, 모자 작업장 주인들은 100년 넘게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찰스 도지슨은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 몸을 심하게 떨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모자 장수가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출판했다.
그러나 입법자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모자는 남성 옷차림의 핵심이었고, 이런 모자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수은이 꼭 필요했다. 인생이 꼭 공평한 것도 아니니, 노동계급 남성 몇 명이 몸을 심하게 떠는 것쯤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이들은 술을 많이 마셔서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자신과 친한 기업가들을 세상의 반발과 규제로부터 보호하려던 당시 산업위생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했다.
청교도 하면 떠오르는 삼각모부터 톱 햇top hat과 높이 솟은 카포틴capotain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이 쓰는 남성용 모자는 비버의 털로 만들어졌다. 두텁고 광택이 나며 따뜻하고 방수효과를 내기 위해, 비버 털을 압축하거나 얼기설기 엉킴 처리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럽과 북미에서 차례로 비버가 멸종 위기에 처했고, 전쟁으로 원재료 공급이 끊기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 대안으로 값싼 펠트를 만들 수 있는 유럽산 토끼털이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토끼털은 비버 털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아서 털을 녹여 분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은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면 모자 제작 속도를 4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처음에는 모자공들이 중금속 사용에 맞서서 잘 싸웠다. 1716년 일종의 노조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모자 제작자 길드가 수은 사용을 불법으로 정의했고 마르세유, 리옹, 파리의 모자 작업장에서 수은을 금지했다. 그러나 1751년이 되자 입법자들은 이런 결정을 거부하고 수은 사용을 합법화했다. 패스트패션이 이미 그 당시 유럽에 널리 퍼지고 있던 셈이다.
수은을 사용하는 모자 제조 방식이 파리에서 널리 활용되자, 1757년 자크 르네 테농이라는 젊은 프랑스 의사가 파리에 있는 6개 모자 제작소를 방문했다. 일꾼들은 “깡말랐고 힘이 없었으며" 손을 떨었다. 또 “땀을 많이 흘렸고 끈적끈적한 물질을 토했으며” 근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술을 많이 마셨다. 그중 레텔리에라는 작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 수은 처리하지 않은 물에 비버 털을 넣고 끓여 사용했으며, 당시에도 다른 작업장보다 훨씬 묽게 희석한 수은 용액을 사용했다. 이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중독 증상이 훨씬 덜했기에 테농은 모자 제조업자들에게 수은 사용을 줄이거나 건강에 문제없는 대체물을 찾으라고 권했다. 불행히도 그의 주장을 담은 글은 이후 50년 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다른 의사들도 자신이 목격한 것을 발표했다. 5개월 된 아기가 모자 작업장 증기를 들이마시고 사망했다. 모자공들은 경련과 마비를 겪었다. 1776년에 《건강 관보 Gazettede santé》는 수은 사용이 “불필요하고, 기이하고, 악의적"이라고 지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자를 쓴 남성(때로는 여성)도 수은에 중독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모자 자체가 유독성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보존 전문가들이 18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들어진 모자를 테스트했는데, 그중 하나에는 모피 펠트 총 중량의 1퍼센트에 이르는 수은이 들어 있었다. 무려 1만 피피엠이라는 놀라운 수치였다(오늘날 패션 브랜드는 그 2만분의 1 정도인 0.5피피엠 이하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박물관의 보존 담당자는 오래된 모자를 다룰 때 조심스럽게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다.
이 당시 모자는 털로 덮인 바깥쪽에 종종 니스칠을 했으며, 비단으로 안감을 덧대고 가죽 밴드를 달아 직접적인 수은 노출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했을 것이라고 매슈스 데이비드는 지적했다. 그러나 광택과 깔끔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모자를 손질하고 빗질하는 과정에서 수은 먼지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일을 맡은 사람은 바로 여성들, 착용자의 아내나 하녀들이었다.
19세기 소비자들이 만성 수은 노출로 고통받았는지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피로, 근력 약화, 발진, 복부 통증, 불면증 같은 수은 중독 증상은 자가면역질환, 염증성 장질환, 우울증 및 기타 신경 퇴행성 질환의 일반적인 증세와 비슷하다." 수은 중독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표준 증상 목록이 오늘날까지도 없기 때문에" 감정 기복, 기억 상실, 정신 질환, 자살 충동 같은 증세를 보이는 만성 수은 중독 희생자는 마을의 괴짜나 술주정뱅이 취급을 받았다. 온몸을 덜 덜 떨고 편집증이 있으며 심술궂은 여자는 중금속 중독으로 진단받기보다는 이상한 노파라고 불릴 가능성이 더 컸다.
놀랍게도 수은은 최근까지 사용되었고,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으로 몇 차례 사용 금지를 이뤄낸 사례가 있다. 《미국 공공보건 보고서》가 코네티컷에 있는 5개 공장의 모자 제조공 중 11%가 만성 수은 중독에 걸렸다고 발표한 지 1년 후인 1941년, 마침내 주 전체에서 모자 제조에 수은 사용을 금지했다. 모자 제조업체는 수은 대신 과산화수소로 모피 처리 방식을 전환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모자 제조 과정에서 수은을 금지한 적이 없다. 1966년까지만 해도 영국 모자 공장에서 수은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미친 모자 장수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적극적인 법적 대응 덕분이 아니라 남성 모자, 특히 구식 펠트의 유행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코네티컷주 댄버리에 있던 마지막 모자 공장은 변화하는 트렌드와 세계화의 희생양이 되어 1987년에 문을 닫았다. 이제 모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패션 제품이 해외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 올든 워커, 부키, 2024, 10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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