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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안보 설계·북미통', 위성락 안보실장 프로필 및 경력

길찾기91 2025. 6. 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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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국회의원, 전 외무공무원

 

출생 1954914

나이 만 70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2024.05.~22대 국회의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객원교수

2011.~주러시아대사관 대사

2009.~2011.한반도평화교섭본부 본부장

2008.~2009.외교통상부 장관 특별보좌관

2004.~주미국 대사관 정무공사

2004.~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실 정책조정관

2003.~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행정관

 

 

 

 

- 더불어민주당 위성락(71) 국회의원이 신임 국가 안보실장으로 임명됐다.

19549월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위 신임 실장은 외교부 출신의 대표적 북미·북핵통으로 꼽힌다.

익산 남성고·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위 실장은 1979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외교부에 입부한 뒤 주러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 본부에서 러시아 담당 동구과장 등을 역임했다.

북미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2003년 북핵 업무를 담당했고, 20093월부터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자격으로 북핵 문제를 관리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후 비핵화 대화가 재개될 때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6자회담이라는 단계적 접근법을 마련한 공도 세웠다.

위 실장은 지난 20대 대선 당시에도 당시 이재명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외교·안보 정책을 지휘하는 실용외교위원장을 맡았다. 2024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고,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산하 동북아평화협력위원회 좌장을 역임했다.

이 대통령은 "외교안보 분야의 풍부한 정책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실용외교, 첨단국방,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라는 국정 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장흥 출생 남성고·서울대 외교학과 졸업외무고시 13주러시아대사관 1등서기관 외무부 동구과장 대통령비서실 파견 주미 참사관 외교부 북미국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조정관 주러시아 대사 주미 정무공사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주러시아대사 - 뉴시스 2025.6.4.

 

 

 

- 더불어민주당 위성락 의원이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한국 민주주의, 계엄령과 함께 드러난 취약성과 회복력(South Korea’s crisis highlights both fragility and resilience)”을 주제로 기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위 의원은 이코노미스트 14(현지시간)자 온라인판에 실린 기고에서 세계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험은 어떤 민주주의도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한국의 투쟁이 전 세계에 귀중한 교훈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 의원은 한국의 정치적 취약점에 대해 정치적 경험이 전무하고 독단적이며 반민주적, 반정치적 사고를 가진 윤석열 같은 인물이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던 극단적 정치 양극화라고 진단했다. 이어 극우적 성향과 자기중심적인 태도, 충동적인 성격은 독재자를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군과 정보기관 내에 여전히 정치에 동원되고, 정치 개입을 하려는 요소가 남아있다윤 대통령은 이러한 두 가지 취약점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4월 총선 참패와 연이은 스캔들로 궁지에 몰리자 타협 대신 극단적인 조치를 선택했다고 비판했다.

위 의원은 국회가 비상계엄을 신속히 해제한 것을 두고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위 의원은 한국의 쿠데타 세력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결의안을 막기 위해 의원을 체포하거나 의회를 폐쇄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시민, 야당, 언론이 이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실시간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수호를 호소했다. 추운 겨울밤에도 시민들은 국회 주변에 모여 군사작전을 방해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첫 방어선이 되었다고 적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윤 대통령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전두환과 같은 계엄령 선포로 한국의 민주주의 위상을 스스로 실추시켰다고 비판했다. 윤석열이 벼랑 끝에 서 있음에도 뉘우침이 없다고 지적하며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위 의원은 1979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 북미국장, 주러시아 대사 등을 지낸 베테랑 외교관 출신으로 22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했다. 위 의원은 전문성을 살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와 정보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위 의원의 기고문 전문(국문 버전)

 

한국 민주주의, 계엄령과 함께 드러난 취약성과 회복력

 

윤석열 대통령의 123일 비상계엄령 선포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데자뷔를 불러일으키며, 1970~80년대 군사 쿠데타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인들은 쿠데타는 과거의 일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번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동시에 회복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즉각적인 위협은 피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이번 위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주요 취약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첫째는 정치적 경험이 전무하고 독단적이며 반민주적, 반정치적 사고를 가진 윤석열 같은 인물이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던 극단적 정치 양극화이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검사로서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 대화와 타협 능력이 부족하며, 사람을 유죄 또는 무죄로만 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러한 사고는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극우적 성향과 자기중심적인 태도, 충동적인 성격은 독재자를 떠올리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기소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충돌하며 독립적이라는 평판을 얻으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극단적 정치 양극화는 보수 진영으로 하여금 그의 독재적 성향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진보 정권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그를 대선 후보로 옹립하게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윤 대통령은 검찰권을 남용해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고 자신과 부인을 향한 법적 문제를 회피하는 데 골몰했다. 그의 정부는 검찰권 남용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문구를 빗대자면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정부"였다.

두 번째 취약점은 군과 정보기관 내에 여전히 정치에 동원되고, 정치 개입을 하려는 요소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관들은 탈정치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들이 군사학교 출신 네트워크를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자신의 고등학교 동문들을 군과 정보기관의 주요 직위에 임명했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두 가지 취약점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4월 총선 참패와 연이은 스캔들로 궁지에 몰리자 타협 대신 극단적인 조치를 선택했다. 정치적 생존이 위기에 처하자, 윤 대통령과 군·정보기관 내 충성파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폐쇄하며, 야당의 의회 다수를 해체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의원들이 신속히 국회에 모여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300명 중 190명의 의원이 모였고, 그중에는 윤 대통령의 소속 당 의원 1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순간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국의 쿠데타 세력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결의안을 막기 위해 의원을 체포하거나 의회를 폐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민, 야당, 언론이 이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실시간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수호를 호소했다. 추운 겨울밤에도 시민들은 국회 주변에 모여 군사작전을 방해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첫 방어선이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하며 축적된 민주주의 수호 정신을 보여주며, 경찰 봉쇄를 피해 담장을 넘고 국회로 진입했다. 계엄군은 본회의장 몇 미터 앞까지 진군했으나, 결의안 표결이 진행되는 동안 결의에 찬 당 보좌진들이 세운 바리케이드에 막혔다. 언론은 현장에서 실시간 보도를 하며 군의 행동을 제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투표를 위한 중요한 시간을 벌어줬다.

쿠데타 실패의 또 다른 원인은 성급하고 엉성하게 실행된 군·경 지도부의 작전이었다. 병사와 중간급 지휘관들은 민간인과 의원들을 공격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이는 1980년 광주학살과 같은 과거 군사 독재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위기 속에서의 성공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쿠데타 실패 이후의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대통령 탄핵안은 압도적 여론 지지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 탄핵안 투표가 성립조차 되지 않았고, 윤 대통령은 반격을 모색하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심은 들끓고 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회복력은 여전히 시험대에 올라 있다.

민주주의 회복력 강화를 위해서는 쿠데타를 주도한 대통령의 퇴진이나 탄핵이 급선무이며, 관련자들은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러한 사태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추가적인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링컨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하자면,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대화를 통해 정치적·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군과 정보기관의 탈정치화를 지속해야 하며, 민주주의 회복력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 군의 투명성 제고, 민간 감독 보장, 그리고 민주적 가치와 권리에 대한 시민의식 고취가 필요하다.

지금 세계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험은 어떤 민주주의도 이러한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계엄령 선포는 민주주의가 단순히 제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적극적 참여, 지속적인 경계, 그리고 시민과 지도자들의 단합된 결의에 달려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의 투쟁은 전 세계에 귀중한 교훈을 줄 것이다. - 국민일보 2024.12.17.

 

 

 

- 1954914일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면(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옥산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님을 따라 전북특별자치도 이리시로 이주했다. 남성고등학교(22),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772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35보병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했으나, 이병 때이던 1978120일 가사 사정으로 의가사전역했다.

19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같은 해 외무부에 입부했다. 이후 문민정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실 행정관,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국민의 정부 외교통상부장관 보좌관, 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행정관,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참여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관,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외교학 겸임교수,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정무공사, 외교통상부장관 특별보좌관, 이명박 정부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이명박 정부 주러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는 따로 직책을 맡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외교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림과 동시에 초기 청사진에 매몰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이후 이재명 캠프에 합류하면서 이재명 후보의 외교참모로 활동했다.

이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후보로 선출되었고,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상임위는 외교통일위원회와 정보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52월 출범한 더불어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202564일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첫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됐다. 공직 취임 시 겸업 및 당적 보유 금지 조항에 따라 탈당 후 의원직을 사임할 것으로 보인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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