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 첫 정무수석, 우상호 전 국회의원 프로필 및 경력
우상호 전 국회의원
출생 1962년 12월 12일,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나이 만 62세
소속 더불어민주당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용문고등학교
2025.04.~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거대책 위원장
2022.06.~2022.08.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비상대책위원장
2020.05.~2024.05.제21대 국회의원
2016.05.~2020.05.제20대 국회의원
2016.05.~2017.05.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14.06.~제19대 국회 후반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간사
2012.06.~2012.11.민주통합당 최고위원
2012.05.~2016.05.제19대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전략홍보본부 본부장
2009.08.~2010.08.민주당 대변인
2008.02.~통합민주당 대변인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이한열추모사업회 사무국장
2006.02.~열린우리당 대변인
2004.07.~문화관광위원회 위원
2004.05.~2008.05.제17대 국회의원
2003.~열린우리당 중앙위원
2001.~콜로라도주립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1997.~비디오그래픽스 전무이사
1994.~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1994.~도서출판 두리 대표
1987.~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동우회 회장
2022.12.제24회 백봉신사상 신사 의원 베스트10
2016.06.제13회 지역신문의 날 국회의원 부문 의정대상
2015.02.제5회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 상임위 모범상
2012.제11회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2006.제8회 백봉신사상
- 이재명 대통령이 초대 정무수석비서관에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임명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보다 '정치 선배'인 우 전 의원을 발탁해 여야 협치 의지를 강조했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은 8일 정무수석에 우 전 의원을 임명하는 등 대통령실 수석급 인선을 단행했다.
우상호 신임 정무수석은 1962년 생으로 '86그룹'(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대표주자로 평가된다. 민주당에서 비상대책위원장과 원내대표를 역임한 중진 정치인이다. 1973년생인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3선)보다 11살 많고, 정치 경력에서도 선배다.
우 수석을 비서실장의 지휘를 받은 정무수석에 발탁한 건 우 수석의 여야 소통 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 수석은 원내대표 시절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을 설득해 박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이끌었다. 계파색이 옅어 여야 의원들과 두루 소통하는 친화력도 겸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취임 초기 정무수석에 3선 의원 출신이자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전병헌 전 의원을 임명했다. 당시 초대 비서실장은 50대 초반의 임종석 비서실장으로 전 전 의원보다 정치 후배였다.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문 전 대통령의 전략적 인사로 풀이됐다.
다만 이재명 정부에서는 여당인 민주당이 171석의 거대 여당이라는 점에서 이번 인사는 여야 협치와 국민 통합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의 주요 인사 원칙 중 하나가 '유능함'인 만큼 나이와 정치 경력에 상관 없이 정무수석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지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강 비서실장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통해 "우 수석은 소통과 상생에 확고한 철학을 지닌 분"이라며 "오랜 의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대한 높은 이해, 합리성, 나아가 뛰어난 정무 감각을 겸비한 인사다. 여야를 초월한 소통은 물론 국민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끌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일각에서는 정무수석 인사가 비서실장 중심의 대통령실 운영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우 수석과 강 비서실장이 의원시절에도 막역한 사이였던 만큼 정무라인에서는 우 전 의원의 능력을 믿고 맡기겠다는 대통령의 의중이 녹아있다는 해석이다. - 뉴스1 2025.6.8.
- 대통령실 새 정무수석에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실 새 정무수석에 우상호 전 의원을 내정했다. 이날 대통령실은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수석급 참모진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 의원은 4선 의원 출신으로 민주당 대변인과 원내대표를 역임하는 등 리더십을 겸비한데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는 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아 이 대통령의 당선을 적극 지원했다. 아울러 여야 의원들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맺는 등 친화력과 소통 능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 머니투데이 2025.6.8.
- 이재명 대통령 참모진 인선에 속도가 나고 있는 가운데 철원 출신 우상호 전 국회의원이 대통령 정무수석에 유력 거론되고 있다.
5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당과 소통하며 정치 현안 및 정무 분야를 담당하는 정무수석에 4선 중진 의원 출신인 민주당 우상호 전 의원이 유력 거론된다. 우 전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이자 골목골목 강원선대위원장으로서 강원 지역과 중앙을 넘나들며 이재명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우 전 의원은 여야 의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맺는 친화력과 정무 감각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민주당 원내대표 등을 지내며 중량감과 언론 소통 능력까지 갖췄다는 평이 많다.
철원 출신인 그는 동송초교를 다니다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가 용문고,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공공정책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울 서대문갑에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19대, 20대, 21대 연이어 당선됐다. - 강원일보 2025.6.5.
- 1962년 12월 12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철원 동송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으로 상경하여 서울숭례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졸업했다. 이후 광운중학교, 서울 용문고등학교(29회),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 6월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공공정책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원래 우상호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체육학과에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38선이 그어진 후 우상호의 집안 재산은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북조선로동당에게 빼앗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국군이 철원군의 일부 지역을 수복한 후 일부 땅을 돌려받았으나 집안은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 모두 성적이 좋았는데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가난이 이유라고 밝혔다. 우상호도 대학에 들어갔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 시절 내내 고생을 했다.
시인의 꿈을 키우면서 국민학교 때부터 글을 쓰는 문예반 활동을 했고, 대학교 또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 오월 문학상(5.18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 수상한 이력을 감안하면 시 쓰는 여고 선생님이라는 목표대로 진로가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1983년 1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30보병사단에서 박격포병으로 복무하였으며, 1985년 6월 6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군대전역 후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게 일반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는 달리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한다. 문학 친구였던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등록금이 없어 입대한 후 나온 휴가에서 박래군이 강제징집 당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우상호는 '84 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년 후배들과 함께 조를 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후배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학생운동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것에 반해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다.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 터진 후 특유의 인망으로 인해 학생회장을 권유받는 원인으로 발전한다. 당시 학생운동은 경찰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천여 명이 구속되고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존 학생운동 참여자 중 절반 가량이 잡혀간 상황으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비운동권 학생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운동권의 시각이 있었다. 한편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자기방어 차원에서 운동권의 투쟁 양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우상호는 자신을 추천한 대학 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내방식대로 맡겨달라고 요구한다. 우상호가 출마한 1987년 연대 학생회 선거는 약 500명이 모였는데, 지원 유세에 문화제 방식의 선거운동이 가미 되자 약 2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비폭력주의 집회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제 형식 선거운동은 다른 대학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내 운동권 서클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기존 시위방식이 달라지자 불만을 가졌다. 우상호는 공개토론을 열어 비폭력 집회 방침을 관철한다. 늦은 참여로 인해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음을 이해한 우상호는 자신의 노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의 정치활동과도 이어진다.
이 때 학생운동 지도부에 당선되면서 폭력운동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다 강성 지하 서클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 예로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이야기를 하다가,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전환시키자 급격하게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체육관 선거를 규탄하다 결국은 6월항쟁의 주역이 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향후 정치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 세력은 강경해진다. 이에 앞서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서울대 박종철 군의 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됐다는 폭로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터지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힌다.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추진했다. 이들은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 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전보다 다수가 참여한 집회 규모에 당황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직사로 쏘기 시작하고 여기서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이 사망한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때에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6월 항쟁이 발발하며 국민적 저항에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4.13 호헌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명줄을 재촉한 자충수가 되어 버렸던 셈이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이한열 열사의 상을 찾아갔고, 상주인 우상호에게 학생들 덕에 풀려났다며 울먹인다.
1987년 8월 22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 촬영한 사진. 가운데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청년이 우상호이다. 사진 오른쪽 태극기를 들고있는 사람은 배우 우현이며 연세대학교 앞 경의선 신촌철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현재의 연세로이다. 여기서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은 이한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했다. 그렇게 6월 항쟁이 끝이 났다.
이후로도 이한열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이한열 군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 1월 배은심 씨가 별세하셨을때도 호상(護喪)을 맡았다. 또한 이 당시의 인연으로 배우 우현과 안내상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하며, 20대 총선과 21대 총선 유세 때 두 사람이 우상호를 지원하기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힌 최환 공안부장 검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 공안검사로서 자신의 선배들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미운 감정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한열 열사가 많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상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총재에게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제안을 받게 된다. 양김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된 후 김대중은 새 인물을 영입해 서울에서 출마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영입된 인사가 이해찬이다.
김영삼이 노무현을 영입한 시기도 1988년이기에 우상호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이해찬, 노무현과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을 할 가능성도 있었고 당시 나이도 만 25세 4개월이어서 민주화 이후 통틀어 역대 국회의원 최연소로 당선된 김영삼(당시 만 26세 5개월)의 기록도 깼을 것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이 제의를 거절하는데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단일화를 요구하다 실패한 책임감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6.10 항쟁을 촉발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우상호는 결국 1988년 검문에 의해 검거되어 국가모독죄를 이유로 수감되고 발이 묶였다. 언론계와 출판사업에 종사하던 우상호는 1995년 민주당의 서울시장 선거를 지지하며 정치입문 단계를 밟는다. 5년 후 우상호가 출마를 준비한 서대문구 갑 지역구는 김상현 전 의원이 당선되던 지역구로, 김상현은 이례적으로 정치신인인 우상호의 출마도 환영하며 경선을 요구한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여론조사로 경선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우상호가 승리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총선시민연대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새천년민주당 진영에서는 한보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걸린 김상현이 낙선명단에 오른 부분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김상현은 불공정 여론조사를 이유로 탈당했다.
이후 우상호는 대학 동문인 이성헌과 지긋지긋한 6번째 데스매치를 시작한다. 자세한 것은 서대문구 갑 문서로. 이성헌은 연대 학도호국단장, 우상호는 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같은 학번이다. 첫 맞대결은 이성헌이 약 2% 차이로 이기지만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에서 우상호가 승리한다.
우상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당시 지역위원장들의 대세인 이인제 전 의원 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 소수의 86그룹 정치인은 대세론 대신 김근태 전 의원을 도왔는데 우상호는 정통운동권 출신이 아닌 노무현을 지지한 것도 특이한 결정이다. 우상호의 결정은 일부 사람들에게 대세였던 이인제 또는 선배인 김근태를 지지하지 않았다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상호는 노무현의 비전을 보고 지지했다고 밝힌다. 우상호는 평소에 국민의 정부 시기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했던 노무현에게 많은 호감이 있었고 지역위원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초청하여 강의를 진행한 바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은 우상호에게 " 우리는 87년 동지들입니다. 그러니 386들이 힘을 합해서 정치를 뒤집어봐야 하는거 아뇨?"라는 내용을 말했다고 술회했다. 당시 2001년 국민참여경선은 지역을 순회하며 경선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제주, 울산, 광주에서 이긴 노무현을 대전과 충남에서 이긴 이인제가 대세론의 위상을 되찾는 상황이었다. 분수령인 6번째 지역경선에서 강원도 득표를 책임진 우상호로 인해 노무현이 신승하고 김중권이 사퇴하며 영남후보론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힌 결과로 이어졌다. 이인제의 다른 텃밭인 경기 경선이 시작되기 전 호남과 영남 경선에서 잇달아 노무현이 완승하자, 이인제 역시 외압을 핑계로 후보를 사퇴한다.
노무현이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은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후원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에 입금된 중앙당 후원금을 다 써버리고 만다. 이에 대선 후보에 따로 대선자금을 모아오라고 요구하던 민주당 지도부와 중앙당 후원금으로 당이 대선주자를 지원하길 원한 노무현 캠프가 격하게 대립했다. 이 앙금은 민주당의 보수적 영입인사들과 결합해 현대가 출신 정몽준을 지지하는 후단협으로 이어졌다. 당시 비노/반노로 분류된 34명의 의원들은 한화갑 전 대표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였고 2002년 10월 4일 이른바 후단협, 독자세력화를 추진하였다. 같은 날 한영애 전 의원이 "성실하고 꾸밈없는 정치인 정몽준을 지지하기 위해 탈당을 결심했다"며 탈당을 선언하며 갈등은 더욱 치달았다. 이에 우상호를 비롯한 이인영 등 수도권 30대 40대 원외 위원장과 이종걸, 임종석 등 현역 의원들은 비노/반노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을 '해당 행위'로 비난하며 국민경선으로 선출된 후보로 뭉칠 때임을 강조했다.
노무현의 대선 후보 지지율이 하락하고 후단협이 노무현을 흔들자, 우상호는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설립하고 부본부장을 맡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 방식으로 노무현에 협력했다. 애초에 중앙당 정치자금이 증발한 상태기에 기업에게 정치자금을 받은 이상수, 이광재, 안희정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지만(...) 우상호는 결국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결국 386세대, 민평련계 대표 정치인 중 하나로 성장했다.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을 여덟 번이나 했다. 대변인은 언론 노출도가 올라가는 장점이 있으나 높은 업무강도로 인해 여러 번 하는 경우가 드물며, 거기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여러 번 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덕분에 당을 위해 희생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대변인을 자주 하면서 우상호는 다른 86그룹 정치인들과 선명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을 하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86 운동권 중에서 언론과 폭넓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인사이다.
오랜 대변인 생활로 주옥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이언주는 경유형 철새, 영도는 철새 도래지가 아니다"라며 이언주에게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 "김문수, 대구에서 뼈 묻겠다더니 살만 올라왔나?"라며 김문수에게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장관의 임명 당시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유인촌 장관은 전북 완주 출신'이라고 발표했는데 유인촌 전 장관이 "서류상 출생지는 전북이지만 나는 56년간 서울에 산 서울 사람"이라고 해명하자 우상호는 "그러면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일본 사람이냐."라고 맞받아쳤다.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