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갈등 조장하며 성평등 정책 포기하는 현 정부에 대한 한국여성학회 입장문
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미온적 대응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기획에 이르기까지
성평등을 향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를 비판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통해 “양성평등”을 구현하겠다는 정부조직 개편안은 기망이다.
지난 10월 6일 정부는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여성 권익증진 및 성평등 업무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하여 이관하고, 여성고용 정책은 고용노동부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여성가족부 자체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양성평등 정책을 실현하기 어렵기에 이를 폐지하여, 보다 실효성 있는 양성평등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는 국민에 대한 기망이다. 성평등 정책의 중장기 방향을 설정하고, 부처 간 업무를 종합·연계·조정하는 것이 여가부의 핵심 업무인데 이 조직을 폐기하고 어떻게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성평등 정책을 구현할 수 있단 말인가?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 시작했던 여가부는 적은 예산과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동·청소년, 가족, 성평등 정책을 추진·실행해왔다. 경력단절 여성 지원, 공공부문의 낮은 여성 대표성 제고, 그리고 젠더폭력 피해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폭력피해 여성 지원 정책이 이에 해당한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청년 여성의 성차별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왜 다수의 여성이 여전히 유리천장과 성별 임금 격차를 경험하고 있으며 디지털 성폭력 같은 신종 성폭력에 시달리고 있을까? 이번 조직개편안이 기망적인 것은 실증적 데이터의 제공과 정책 목표에 대한 검증과 분석 없이 여가부 폐지를 외쳐왔던 일부 극우 남성의 대중추수주의와 부합하여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여가부 폐지의 근거로 사용하는 사례 또한 매우 지엽적이다. 예를 들어, “피해 호소인”의 사례를 들어 과거 여가부 장관과 민주당 의원의 실책을 지적하면서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자고 나선다. 한국 사회의 수준 높은 삶의 질과 사회적 안정을 위해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꾸준히 추구해야 할 성평등을 정치 반목과 경쟁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지난 20년 동안 여가부는 실질적 성평등 실현을 위해 정부의 모든 부처에 성평등 책무성을 부여하는 성 주류화 정책을 이끌어왔다. 여가부는 5년마다 국가가 지향해야 할 성평등 정책의 목표와 과제를 설정하고 각 부처와의 논의를 통해 이를 실현할 정책을 수립했으며 각 부처에 산재한 성평등 업무를 총괄·조정하였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이번 조직개편으로 건강, 출산 및 양육, 빈곤, 장애, 사회복지, 인구정책 등 양성평등정책의 실질적 집행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장관과 보건복지부장관이 직접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성평등 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부의 임기응변식 답변은 실효성이 없다. 특히 여성가족부의 중요한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시키는 것에서 현 정부의 여성관이 드러난다. 한국 여성을 저출생이라는 인구문제 해결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접근법이 반영된 보건복지부로의 이관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가 인구 및 가족 정책의 틀 안에 여성을 밀어 넣고, 모든 공사 영역의 성불평등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성평등을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정부에 요구한다. 정부는 여가부를 다른 부처에 종속된 기관으로 축소하면서 실질적인 양성평등을 구현하겠다는 모순적 논법으로 더 이상 민주시민을 실망시키지 말라. '실질적 양성평등'을 원한다면 우선 국가 성평등 목표를 설립하고, 성평등 정책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부처에 실질적인 권한과 자원을 강화하라. 또한, 그간 전문가들이 제안했던 바와 같이 각 부처 내에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을 확대하여 성주류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조성하라. 대통령과 모든 국무위원의 성평등 의식은 개인적인 차원의 한계로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국가 위상에 큰 영향을 준다. 이에, 새 정부의 리더들은 국내외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한국 사회의 성평등 개혁을 완수할 의지를 갖춰야 한다.
누가 젠더갈등을 조장하는가? 젠더폭력을 방치하는 정치를 규탄한다.
정부는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여가부가 “젠더갈등을 해소한다기보다 그 갈등을 촉진, 부추기는 측면으로 흐른 적이 여러 번 있었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남성이건 여성이건” 개인적 차원에서 충분히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젠더폭력을 말하면 젠더갈등이 일어나니 모든 것을 개인적 복지의 문제로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고 경험하는 아동, 여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마치 없는 것처럼 침묵할 수 없다. 학교, 일터, 거리, 군대, 미디어 등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젠더폭력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국가와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길밖엔 없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젠더갈등을 없애는 길이다.
최근 정부와 여당은 인하대 사건, 신당역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젠더폭력”의 의미를 지우고 사건을 개인적 문제로 축소해왔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인하대 여학생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학생 안전의 문제”라고 말했고, 권성동 의원은 신당역 역무원 살인사건을 ‘그저 스토킹 사건’일 뿐이라고 언급하였다. 남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이 사건을 통해 젠더갈등을 조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같은 논법으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보건복지부로의 이관을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가 분명하게 관철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젠더폭력에서 여성을 지우는 여가부 장관의 편협한 시각은 객관적, 통계적 근거가 전혀 없다. 2020년 경찰청 추산 성폭력 강력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이 여성이었고 스토킹 범죄 피해자의 약 70%,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 상담자 중 약 90%가 여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문제를 개인 간 범죄로만 환원한다면, 근본적 문제는 풀리지 않고 범죄자만 처벌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젠더갈등은 저변에서 더욱 확대될 것이다.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는 가정폭력을 부부간의 개인적 문제로만 축소하지 않고 젠더화된 폭력으로 인식해 그 해결에 힘써왔다. 또한, 한쪽이 애정이라고 주장해도, 당사자가 원치 않는 일방적 접근은 ‘스토킹’으로 정의함으로써 친밀성이란 이름으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성평등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를 만들어 왔다.
시민사회 전반에서 젠더폭력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고양된 상황에서 정부는 왜 젠더폭력을 지우는 퇴행의 길을 가려 하는가? 왜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정부는 체계적인 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야 할 주무부처를 폐지하려 하는가? 우리는 엄연히 존재하는 젠더폭력 피해 당사자의 죽음과 고통 앞에서 정부가 왜 이런 말장난을 하는지 묻고 싶다.
젠더폭력은 위계 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며 남성 또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정부는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젠더폭력’을 지울 것이 아니라, 젠더폭력의 위계적 구조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젠더폭력을 줄여나가야 한다. 국가는 젠더폭력을 지움으로써 이를 방치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목표, 그리고 교육을 통해 시민들이 피해자나 가해자, 나아가 방관자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권과 지도자의 정치적 책무이자 국제 사회와의 약속이며 국가의 위엄을 지키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말라
개인의 처벌로 젠더폭력이 사라지지 않듯, 몇몇 여성의 성공이 성평등 사회의 완성을 말해주지 않는다. 성평등 정치는 축적된 차별과 그 재생산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함께 분담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다.
성평등에 대한 지향 없이,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 실업과 사회적 안전망의 실종, 살인적 노동 상황의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없다. 남성의 70%밖에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성의 차별적 상황은 이제 비정규직 전반으로 확산하였고, 직장 내 괴롭힘과 노동 통제는 구성원의 노동할 동력을 잃게 만든다. 사회 안전망 역시 여성의 사회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할 때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열악한 지위에 놓인 여성 문제 해결과 차별 금지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행복과 안녕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인구문제 역시 경제적 이해관계나 혈연중심, 법률 중심의 가족개념을 벗어나 가족 다양성과 성평등 가치의 토대 위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가 고수하는 ‘건강 가정’의 법적 정의는 1인 가구와 비혼 동거인의 증가와 같은 변화하는 가족 현실을 외면한 채, 돌봄과 생계를 함께 하는 수많은 시민을 복지, 의료, 조세제도 등에서 배제하고 있다. 현 정부의 일련의 퇴행적 조치는 더 많은 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확장해온 민주주의의 역사의 훼손이다.
성평등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함께 질 때, 우리는 민주주의 이념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성주류화 정책과 그 구심점으로서의 정부 부처의 기능 강화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여가부를 폐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성평등을 이룰 수 있도록 그 목표와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정책총괄기능의 권한을 확대하여 독립부처로 개편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에 진지하게 요구한다.
- 젠더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무지와 악의적인 선동을 멈추고, 현실을 직시하라.
- ‘여성가족부 폐지’를 왜곡된 현실 이해에 기반한 우파 대중추수주의로 사용하면서, 국론을 분열하지 말라.
-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버리고, 의사결정의 주요한 행위자로 국정에 참여시켜 민주주의의 질을 높여라
- 결혼 기피와 저출생을 성차별과 불평등 구조에 대한 여성들의 엄중한 경고로 인식하여, 성평등 관점에서 가족, 고용, 의료, 보건 정책을 재편하라.
- 여성가족부 폐지 정부조직개편안을 철회하고 성평등의 국가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여 성평등증진부와 같은 독립부처로 그 위상과 기능을 강화하라
- 각 부처에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를 확대·설치하여 성평등 정책에 대한 책무성을 부여하라.
2022년 10월 11일
한국여성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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