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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분꽃 - 김재윤

by 길찾기91 2021.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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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김재윤

 

허깨비가 만든 방에 갇혔습니다

허깨비 시간을 허깨비들과 함께 걷습니다

허깨비가 주관한 연극에 출연합니다

주연입니다

나는 허깨비가 되고 허깨비는 실재합니다

허깨비가 짠 일과표에 따라

헛둘헛둘 구령에 맞춰 출근합니다

마법이 공기에 녹아듭니다

가뭄에 시드는 분꽃에 물을 주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다 문턱에 걸려

마른 땅에 물을 쏟았습니다

물을 쓸어 담는 손이 눈물을 흘립니다

허공을 휘젓는 나의 손은 허망하고

태양은 나의 몸을 칭칭 묶습니다

정신을 잃은 마법의 책이 불이 번집니다

오후 4시, 의식을 회복한 나는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합니다

바다로 갑니다, 어머니 몸에 사는 바다로 갑니다

날마다 탄생하는 바다로 갑니다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지만

그날 바다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피였습니다

지난 생의 허물

이 생에서 갚느라, 이 생이 힘겨워도

저 생에선 행복할 수 있다기에

견딜 수 있다지만

견딜 수 있을까요

나에게 마음껏 화를 내요

다른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마요

그대가 떠난 후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걷습니다, 그냥 걷습니다

낙타도 사람도 밤을 기다립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마법처럼 분꽃이 피었습니다

이불을 덮어 줘요

자장가를 불러 줘요

분꽃이 힘을 내어 지구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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