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인 시국선언문]
2022년 10월 29일, 159개의 우주가 소멸되던 그 밤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좁은 골목길로 내몰리던 10만 명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우리의 이웃, 우리의 형제, 우리의 아들딸, 우리 자신이었다. 축제에 나온 우리들의 생명과 안전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밤의 아픔과 슬픔, 충격과 공포는 죽어간 이들과 살아남은 우리의 몫으로 오롯이 떠넘겨지고 있다. 예견된 참사, 끝없는 구조요청과 신고를 외면하고 불과 1,500미터 옆 대통령 용산집무실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던 공무원은 누구로부터 녹을 받아먹는 누구의 공무원인가?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책임자처벌의 요구와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외침에도 우리 사회는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세뇌당하고 있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정부, 희생자 이름도 영정 사진도 하나 없는 분향소를 거대하게 차려놓고 일방적인 애도를 강요하던 정부에게 우리는 묻고 싶다. 우리는 꼭 알아야겠다. 왜 막을 생각이 없었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그날 밤 희생자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왜 유가족들에게 감추고 알리지 않았는지. 왜 유가족들을 모이지 못하게 했는지….
우리는 예술인이다. 예술인은 침묵과 무기력, 눈치보기, 줄세우기에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촛불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예술작품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세상을 밝힌다. 외세에 의해 유린당하고 전쟁의 참화를 지나 현대사의 굴곡과 소용돌이를 겪어온 우리 역사와 삶의 길목마다에서 예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해왔는가? 반외세, 반봉건, 보국안민의 동학운동과 자주독립을 선언한 3.1만세운동, 부정선거 규탄과 민주실현을 외치던 4.19민주항쟁, 5월학살자 군부독재를 끝장내려던 6월항쟁, 농민들의 삶에 함께하는 농민회운동, 민주노조의 힘으로 일떠선 노동조합운동,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나라를 바꾸어온 시민운동, 대추리-매향리-군산미군기지-강정해군기지-성주사드기지에서 울려퍼지는 평화운동, 416세월호참사와 박근혜퇴진 촛불의 거리에서 빠짐없이 우리 예술인들은 ‘살만 한 사회’를 간절하게 염원하며 어둠을 밝히려고 행동해왔다. 우리는 마땅히 기꺼이 그러했고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살만 한 나라가 되었다고도 생각했다. 슬프고 힘들고 억울한 곳, 이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즐겁고 경쾌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며 노래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더 이상 예술이 겨울 거리에 서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불과 0.7%, 24만 표 차이로 취임한 윤석열 정부는 역사의 퇴행과 역행을 저지르고 있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의 말을 경청하고 민의를 따라야 마땅한 선출직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것 마냥 오만과 만용을 일삼고 있다. 충분한 검토와 논의도 없이 2달 만에 대통령실 이전을 강행한 이후 검찰 권력을 앞세워 야당을 길들이려 들고, 자신들의 정당조차 ‘윤핵관’과 우익 전체주의자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대결적 정치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다시 기계를 돌려야하는 처참한 노동현실에서도 노동조합과 노동운동가를 불온시하고 사문화된 국가보안법을 꺼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잡아가두며 온 국민을 불안정노동·장시간노동의 암울한 삶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오직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국민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쥐어짜도 된다는 산업개발 독재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공조를 앞세워 동북아의 평화질서를 깨뜨리고, 동북아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험천만한 대결주의 망동으로 내달리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국가들과의 국제연대를 추진하겠다면서 낡고 천박한 이념대결을 도모하며 신냉전의 돌격대를 자처하는 윤석열 정부에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소모품이자 기회비용일 뿐이다. 이 땅에서 벌인 잔혹한 일본 군국주의 전쟁범죄에 굴욕적인 면죄부를 주고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포장한다. 국가 간 이념 대결과 군사력 대결은 결국 침략과 전쟁으로 귀착될 뿐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맺자는 당연한 이야기도 북한의 지령이라며 친북좌파로 몰아 잡아가두는 퇴행을 어찌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자행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국가소송을 통해 피해 예술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예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법률적 조치로 ‘예술인권리보장법’까지 제정되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자신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청소년의 만평 입상을 취소하고, 행사 공연 선곡을 바꾸지 않는다고 공연 순서에서 제외하고, 국회의 전시작품을 새벽에 강제 철거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각종 문화예술기관 단체장들을 코드인사로 일제히 교체하고 지원예산의 편향적 삭감과 몰아주기를 자행하고 있다. 국회와 지방의회에선 정부여당 의원들을 앞세워 특정 문화예술인들을 조사하며 물어뜯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피땀으로 일구어온 민주·평화·인권의 시계를 30년 전으로, 아니 100년 전으로 거꾸로 돌리고 있는 정권의 망나니춤을 지켜 볼 수만은 없다.
“우리는 권력에 충성하지 않는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래할 것이며,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창조하며 그릴 것”이라는 저들 입술 위 거짓의 말은 우리에게 와서 참말이 될 것이고 우리의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불공정과 몰상식의 세상에서 블랙리스트가 될 것이다.
다시 이곳이다. 또 그 자리라는 낙담과 허무를 허물고 새롭게 다시 이 곳이다. 3월 만세를 외치던, 4월 의거를 시작하던, 6월 열사를 눈물로 부르던, 눈망울 같은 촛불을 들고 다짐하던 이곳 광장이다. 바로 여기에 차가운 겨울을 석 달 견디고, 불온한 봄을 또 두 달 기다린 159청춘들의 영정이 있다. 우리 예술인들은 10월 29일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유가족들의 곁에 설 것이다. 무책임을 거짓으로 가린 자들이 처벌받을 때까지 희생자들의 영정 곁에 서서 그들의 존엄을 지킬 것이다. 이곳에 굳게 발을 딛고 연대하며 우리 예술인과 문화예술단체들은 생명과 평화를 향한 걸음을 힘차고 끈질기게 내딛어 갈 것이다.
2023년 3월 29일
10.29이태원참사와 퇴행적 역사 현실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 시국선언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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