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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원인과 대상
파스칼의 말을 좀 더 일반적인 어법으로 공식화해보자. 이는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원인'을 구별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욕망의 대상'이란 하고 싶다. 갖고 싶다는 마음이 향해 있는 대상이며, '욕망의 원인'이란 하고 싶다, 갖고 싶다는 욕망을 인간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이유다.
토끼 사냥에 적용해본다면 '욕망의 대상'은 토끼다. 토끼 사냥을 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토끼를 향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끼를 갖고 싶어 사냥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토끼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불행한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외면하고 마음을 달래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토끼 사냥에서 토끼는 '욕망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욕망의 원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냥하면서 토끼가 갖고 싶어서 사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욕망의 대상'을 '욕망의 원인'과 착각하는 셈이다.
도박에서도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원인'을 구별할 수 있다. 도박하고 싶은 욕망은 이익을 얻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도박하고 싶다는 욕망의 원인은 아니다. “매일 돈을 줄 테니 도박을 그만 두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는 돈을 벌고 싶어서 도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라도 '욕망의 원인'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지루함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비참함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에, 기분 전환을 원하기 때문에, 땀을 흘려가며 토끼를 쫓고 재산을 탕진할 위험을 감수하며 도박을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원인'을 착각한다. 그래서 토끼를 갖고 싶어서 토끼 사냥을 간다고 굳게 믿는다.
열중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 전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느낌조차 든다. 자루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선택할 수 있는 기분 전환 중에서 각자에게 어울리는 것을 선택할 뿐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분명 조건은 있다. 기분 전환은 열중할 수 있어야 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왜 열중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할까? 열중할 수 없다면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기분 전환의 대상을 손에 넣는다면 자신이 정말로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스칼은 기분 전환에는 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열중해서 목표물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원인' 사이의 구별을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의 대상'을 '욕망의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열중할 수 있는 사건을 원한다.
자신을 속인다고 하지만, 심각한 뜻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인간은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반드시 기분 전환을 원한다. 즉. 지루함이란 인간이 결코 떨쳐낼 수 없는 '병'이다. 그런데 이 병은 토끼사냥이나 도박처럼 열중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간단히 피할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이 지닌 비참함의 본질, 즉 인간은 이토록 간단히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가장 어리석은 자
지금 우리는 파스칼의 말을 빌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치 이런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라는 듯이 말이다.
앞서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원인'을 구별했는데, 이는 정말로 편리한 구별이므로 일상생활에서 응용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당신은 자신이 지닌 욕망의 원인과 욕망의 대상을 착각하고 있군"이라고 지적할 만한 일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마주칠 것이다.
그러나 토끼 사냥과 도박과 같은 기분 전환에 열중하는 사람을 향해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틀림없이 파스칼에게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욕망의 원인과 욕망의 대상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만 하는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다.
이어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기에, 예컨대 당구대 위에서 '구슬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을 전환할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은 다음 날 친구들에게 게임에서 이긴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자들 역시 지금까지 누구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동료 학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서재에 틀어박힌다.
또한 "네 문제는 바로 그 점이야!"라고 남에게 충고하고 지적하는 일에 몸이 부서져라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 "이렇게 해서 스스로 현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런 것을 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그중에서도 제일 어리석은 자다"사냥과 도박은 분명 기분 전환이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손해도 행복해지지는 않아"라고 다 안다는 듯 지적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기분 전환이다.
게다가 마지막 유형의 사람은 앞서 살펴본 욕망의 원인과 대상에 대한 착각을 깨달아서 자신은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가장 어리석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한권의 책, 2014, 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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