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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기계
사회지도층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하층민을 지나치게 착취하면 하층민이라고 해도 가만있을 리 없다. 수십 년 동안 발암물질이 들어오는데 참을 수 없다. 본디 수명이 짧아 빨리 분열해야 하는 상피세포들의 DNA에 돌연변이가 누적되다가 우연히 죽지 않는 유전자가 활성화되고 면역을 회피하는 유전자 변이가 만들어지다 보면, 이 세포들은 드디어 암세포라고 불릴 정도로 이상하고 독한 단계로 변신한다. 마침내 반란군이 태어나고, 사회의 구조를 흔드는 시작점이 된다.
지도층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갈아 넣으며 일을 하는데, 지도층은 이를 알지 못한 채 더 많을 이익을 추구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여기에 더해 사회 시스템이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기보다 제 살길을 모색하게 된다. 사회의 질서와 시스템이 붕괴하고 각자도생 사회가 되면 그나마 유지되던 행동 지침이 무력화된다. 행동 지침을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세력의 숫자가 늘어나고, 조직화되고, 주변으로 퍼져 나가면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 현장에서 가장 힘들어하던 힘없는 세력이 민란의 동력이 됐다. 민란의 과정에서 흔히 폭력이 동반되기도 한다.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민란이 더욱 확대되면 반란이 된다. 반란군과 진압군 모두 같은 국민이며 적은 내부에 있었으나 내전에서는 피아구분이 어렵고 무엇이 사회정의인지 누가 반국가세력인지 알기 어렵다. 실제로 사익을 위해 국민을 탄압하고 국가를 비정상적으로 운영한 사회지도층이야말로 반국가세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다가 반란이 커지면 사회가 전복되고, 시스템이 붕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란군을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기 전에 이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사회의 질서를 위해 불만을 갖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살펴야 한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들을 압박한 기득권층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을 비난하고 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까? 우리가 기득권층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나 자신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일하는 대학병원 연구실의 사무실은 항상 깨끗하다. 누군가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 첫차를 타고 사무실에 와서 내가 출근하기 전인, 새벽 6시에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 노동자분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저 사무실은 늘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다가 내 연구실 청소를 담당하는 분이 갑자기 몸살이라도 나서 하루 결근이라도 하면 사무•실이 왜 지저분하냐고 불평을 했다. 배달 노동자들이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또는 눈이 오는 밤에 내가 주문한 짜장면을 불기전에 배달하기 위해 과속한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살아왔다. 택배기사들이 하루에 200개의 택배를 어떻게 배달하는지, 그리고 그 과중한 노동이 그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무관심했다.'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 유지되는 사회, 그 희생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내 몸의 여러 세포들 덕분에 건강이 유지되고 있다면, 이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
적어도 내 몸을 사랑한다면 내 몸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 몸이 건강하기를 바란다면 내 몸이 건강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는 아주 단순한 진리다. 그러나 이를 평생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사랑한다면서 몸이 싫어하는 헤로운 짓을 골라서 하고 그러면서도 건강하기를 바란다. 건강할 때는 건강하다는 이유로 건강을 지키지 않는다. 그 결과 건강을 잃게 되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야 건강이 최고라며 후회한다.
건강은 건강할 때 드러나지 않고 건강을 잃어야만 드러난다. 현장의 노동자도 그렇다. 현장 노동자의 존재는 역할이 멈췄을 때 드러난다. 정치인은 무슨 일을 하면 신문기사에 나지만, 환경미화원은 파업을 해서 쓰레기가 쌓여야만 신문기사에 난다. 평소 그들의 노동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지적하는 주류 언론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역지사지의 시선으로 암의 탄생을 바라보면, 관점이 전환된다. 아마도 암세포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암세포가 처음부터 암세포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보통의 세포였다. 다만 보다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었을 뿐이다.
수십 년간 담배를 피우면서 타르와 같은 수천 가지 발암물질이 계속 죄 없는 폐에 들어왔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자외선이 피부를 계속 때려댔고, 탄 고기 속 발암물질인 벤조피렌이 들어와도 이를 꾸역꾸역 소화해냈다. 해로운 물질들이 들어오면 몸은 이를 거부하며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만성적인 염증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 국소적으로 활성산소가 많아지며 DNA 돌연변이가 쌓이게 된다.
차라리 독성이 너무 강하면 세포들이 그 자리에서 죽으면서 끝날 텐데, 이런 발암물질은 독성이 애매하게 낮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해결해달라고 외치지만 바뀌는 것이 없는 현실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 현실을 바꾸어주지 못하면 독하게 살아남아서 내가 현실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세균들은 수십억 년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균은 영양분이 고갈되고 환경이 열악해지면 미친 듯이 복제하며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마치 새로운 생존 기술을 찾아내려는 듯 발버둥 친다. 궁지에 몰리면 세포들은 돌연변이를 통해 곤란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이는 환경의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성을 획득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우리 몸의 세포에는 이런 고생대 세균들의 생존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발암물질로 둘러싸인 가혹한 환경에 노출된 세포들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이 유전자를 활성화해 암으로 변신한다. 중앙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존만 추구하는 단세포 유기체처럼 행동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나머지 몸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법이다. 증오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 증오는 그들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암세포로 변하기 전에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암세포로 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김범석, 흐름출판, 2025, 25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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