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卷賦만권부] 페스트, 코로나19의 교훈
“갑작스레 오한이 나며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이 동반된다. 환자는 곧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길면 2-3일에서 짧게는 발병 24시간 만에 숨을 거둔다. 시체에는 검은 반점이 생겨난다.” 14세기 유럽을 공포로 몰고 갔던 페스트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원인도 몰랐고, 그래서 치료법도 몰랐던 보이지 않는 적 페스트는 대단히 강력했다. 1340년대 유럽에서 당시 인구의 1/5-1/3인 2-3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그 여파 또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줄어든 인구로 인해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봉건 제도가 무너졌고 경제 체제도 큰 변화를 맞는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일손 부족으로 농민의 몸값이 올라갔다.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수확할 농민을 구하기 위해 영주들은 전보다 2-3배 비싼 임금을 지불해야 했다. 교회의 위상도 급격히 낮아졌다. 말단 성직자들이 시체를 매장하고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는 사이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을 버리고 달아났고, 숨진 성직자를 대신해 새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 중 일부는 교구민을 수탈하는 데만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교황권이 하락하고, 죽음으로 인한 염세주의에 물든 중세 유럽인들은 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발열과 호흡기 증상인 기침과 인후통이 주요 증상인 코로나19는 지난 연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지금은 전 지구적 재앙이 됐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던 나라들도 속수무책 당하면서 셧다운의 기간이 길어지고 있고, 성질 급한 나라들이 조금씩 긴장을 푸는 사이 더 급격하게 퍼지면서 그 끝을 추정조차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메르스의 경험을 잊지 않고 준비한 덕에 비교적 잘 대처해 왔지만, 신천지로 인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의 시간이 길었다. 심지어 그 위기마저 잘 대처한 덕에 방역모범국가라는 칭송을 들었지만, 기간이 길어지면서 긴장의 끈을 놓는 이들이 하나 둘 생기는 추세다. 언제 이 난리가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우리나라가 종식을 선언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인들을 제외하고는 전 국민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다. 진심 걱정인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예상 범위를 넘어선 현실은 하루하루를 버겁게 버티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1351년 잉글랜드는 실질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구질서를 뒷받침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노동자법률>이라 불린 이 법률은 보통 사람들이 페스트 발발 이전과 같은 임금으로 일할 것을 요구했고, 지주들이 화폐 대신 노동의 형태로 소작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물가가 상승하면서 많은 이가 소득 정체와 생계비 급상승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한 세대 동안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영주와 농노, 부자와 빈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381년 잉글랜드 농민반란이 그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예외 없이 경제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상황이다. 페스트보다 더 깊고 큰 내상을 입은 상황에서 각 경제 주체들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본은 더 강화된 통제권 아래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사려 할 것이다. 그에 따라 생존의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은 각자의 처지를 호소하며 '우리도 살자'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 코로나19 앞에서 단결하고 연대하여 극복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공감하고 찬성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큰 파고를 같이 헤쳐나갔음에도 살아남은 이후에는 그 피해가 더 약하고, 더 작은 이들에게만 향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년도 최저임금 동결 또는 인하를 주장할 사용자 단체들이 나올 것이고 노동자들은 아주 큰 인상폭을 말할 것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들은 그것의 열매를 자신들을 배불리는데 교묘하게 적용시킬 것이다. 국민들은 IMF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부심만 갖고, 기업은 배부른 결과를 낳았던 때처럼 말이다.
1348년 무렵부터 페스트는 차츰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몇 도시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도시가 새로이 건축되면서 하수구 등 도시 기반시설과 위생시설물들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300년이 지난 뒤에야 원래 유럽의 인구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14세기 페스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후에도 페스트는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에 걸쳐 각국에서 재발했다.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전 지구적 노력이 경주되면서 조금씩 희망이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조차 국가 이기주의나 이익독점을 위한 구상들이 있음을 본다. 홀로 잘 살 수 없음을 이 상황에서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이미 추락한 선진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들의 미래는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변종은 이미 시작됐고, 또 얼마나 많은 무서운 적들이 출현할지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코로나는 대위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함께 살자’가 전 지구적 구호가 될 수밖에 없다.
김성현 - <萬卷堂> 제1권 제2호. 2020. 6. 24.
참고 도서 ----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박영흠, 청아출판사. 2011.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윌리엄 A. 펠츠, 서해문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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