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정치부회의에 나와 매일 정치 관련 소식을 전하는 양원보 기자가 쓴 <1996년 종로, 노무현과 이명박 엇갈린 운명의 시작> 위즈덤하우스, 2018. 이라는 책에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온다.
1995년 8월 전국에 내린 집중호우로 곳곳에 수해가 발생했다.
특히 충남 지역에 피해가 컸다. 민자당 지도부는 소속 의원들에게 적십자를 통해 수해 성금을 내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즈음 민자당 종로지구당 사무실에선 회의가 열렸다. 얼마를 낼지를 놓고서였다.
“성동 이세기나 용산 서정화는 얼마나 냈대?”
이명박은 같은 당 서울 지역구 의원들의 상황이 궁금했다.
“제가 조사를 해보니 대략 100만 원 선에서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만….”
한 참모가 말끝을 흐렸다.
“다만 뭐? 왜?”
이명박은 생략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의원님께서는 기업인 출신이시고 하니까 다른 분들보다는 조금 더 내시는 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이 새끼야?”
이명박은 회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잡아 던졌다. 참모가 간신히 피했기에 망정이지 가만있었더라면 피를 볼 뻔한 상황이었다.
“의원님, 고정하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이명박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자식아, 그게 네 돈이야? 어디서 함부로 이 씨…….”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김유찬은 <이명박 리포트>에서 이명박을 7년 넘게 모셨던 운전기사가 하루아침에 쫓겨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루는 우연히 거리에서 이명박 씨를 모셨던 운전기사 이 모 씨를 만나게 됐다. (중략)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이명박 의원에게 200만 원만 꿔달라고 했어. 전세금이 올라서 목돈을 갑자기 만들 길이 없었거든. 바로 다음 날부터 그만 나오라고 하더라고. 그래도 성실하게 7년이나 모셨는데…….”
이명박의 돈 씀씀이에 대한 당시 종로지구당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가진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안 썼다는 거다. 주종탁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이명박 씨가 우리한테 질리도록 했던 말이 ‘경영 마인드’였습니다. ‘우리 정치도 경영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는 거였죠. 돈 함부로 쓰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기업 경영하고 같습니까? 기업은 돈을 아끼는 게 선이지만 정치는 돈을 써야 하는 거거든요.”
돈에 대한 이명박의 인색함은 곳곳에서 뒷말을 낳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명박은 1993년 6.3동지회 회장에 추대됐다. 그런 배경에는 그의 재력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어지는 주종탁의 이야기.
“왜 이명박 씨에게 회장직을 맡겼겠습니까? 돈 좀 내라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6.3동지회 행사 때 사람들이 공짜 밥이나 얻어먹자고 왔다가 ‘회비 내라’는 말 듣고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해요. 있는 놈이 더 하다고 다들 욕했대요.”
당시 종로지구당 살림을 맡은 사람은 권영옥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이명박과 사돈지간이다. 주종탁에 따르면 권영옥이 이명박과 지구당 간부들 사이에 끼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권영옥 국장이 어느 날 저한테 그러더군요. ‘나도 MB에게는 돈 이야기 절대 안 한다. 정말 꼭 해야 하는 상황이면 매제 김재정을 통해 이야기했다’고. MB는 ‘감방 갈래? 돈 내놓을래?’ 하면 감방 갈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그에게 돈은 신앙이었죠.”
좀 길기는 하지만 굳이 인용한 것은 전후 맥락을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돈이 신앙인 사람’이라는 말이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돈을 신앙으로까지 격상시켜 우러른다면 이미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도 돈을 좋아하고 그 필요를 절실히 느낄 때가 많다. 별로 잘 하는 것도 없고, 버는 재주보다는 쓰는 재주가 더 신박한 나로서는 이 나이가 되도록 별로 모아 놓은 것도 없고 미래에 대한 준비도 부족하다, 당연히 돈의 필요를 매일 절감한다. 두 아들이 크는 동안 그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끔은 내 작은 능력을 탓하기도 했다. 고맙게도 그간 두 아들은 내게 특별히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유행 따라 필요한 것들에 대해 특별히 매달리지 않았다. 고마운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이 혹시 너무 이른 나이에 아비의 무능력을 헤아린 어른스러운 대처였다면 말이 달라진다. 너무 이르게 어른이 되는 걸 원하지도 않았고 그리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아이들이 그럴 정도였다면 내 모습이 그만큼 없어 보였다는 말이 되니까.
하여간 돈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필요는 간절하고, 그만큼 수입이 형성되지 않으니 아쉬운 경험을 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돈을 신앙으로까지 격상시켜 섬기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앞에 인용한 책의 내용이 마음 아프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으나 다른 단편적인 증언에 따라 어느 정도 사실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윤옥 여사가 대선 전인 2007년 사업가로부터 명품 가방과 함께 현금 3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보도가 나온 시기에 당시 MB 캠프 전략기획본부장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를 했었다. 본인이 확인한 사안이라면서 인터뷰 말미에는 명품 가방을 포함해 다수의 뇌물 수수 의혹이 제기된 것에 대해 돈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려 했던 게 큰 잘못이라며 돈이 일종의 신앙인 것. 돈의 노예가 돼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저런 글과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부부는 돈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과 경우에 따라서는 불법도 용인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해석에 따라서는 그 모습이 신앙으로까지 비친다는 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난 모르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부만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사실은 우리 누구나 돈을 좋아하고 심지어 편법, 불법을 통해서라도 갖기를 희망한다. 그것도 안 되면 요행이라도. 그만큼 돈은 효용 가치가 크고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SBS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의 특집 2부작 ‘돈 나라 사람 나라’ 제작을 위해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이 주저하지 않고 ‘행복의 제1조건’으로 꼽는 돈의 의미와 철학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국 30~50대 성인남녀 74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얼마면 가족, 친구와 절연할 수 있을까’를 물었더니 10억 원 이상 50.8%, 5억-10억 원 미만 7%, 1억-5억 원 미만 3.6% 등으로 억대만 넘어가면 가족이고 친구고 간에 버릴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100명 중 1-2명은 1,000만 원 미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답변까지. 10억 원만 주면 가족, 친구와 절연하겠다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확실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는 항목에서는 로또 등 복권(32.3%), 부모의 유산(27.7%), 부동산 투자(22.3%) 등을 꼽았다. 답변은 소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났다. 월 300만 원 이하의 소득자는 로또, 유산, 부동산 순으로 생각한 반면 5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는 유산, 부동산, 로또 순으로 생각했다. 평생직장을 다니며 알뜰하게 저축해도 아파트 한 채 장만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세태를 낳았음을 슬프게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의 돈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20억 원(32.7%), 30억 원(28.6%), 10억 원(17.7%) 등이라고 답변했으며 소득이 높을수록 액수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문제는 53%의 사람들이 그 금액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필요는 하고, 갖고 싶기는 하고, 가급적 많아지기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그 큰 돈을 만져보기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은 포기하지 않기에 복권을 매주 사는 것이다.
‘2017 복권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복권이 있어 좋다’는 복권 종합평가 공감도는 74.5%로 2008년 이후 최고치 기록했다. 최근 1년간 복권 구입 경험에 대해 질문한 결과, 57.9%가 구입 경험 ‘있다’고 응답했다. 로또복권은 ‘한 달에 한 번’ 구입하는 사람이 21.7%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매주’(18.4%), ‘2주에 한 번’(14.7%) 순이다. 연금복권과 즉석복권은 ‘1년에 한 번’ 구매자가 각각 27.6%, 24.8%로 가장 많은 비율을 보였다. 복권 구매비로는 로또복권과 연금복권 모두 구매자의 대부분이 1만 원 이하로 구매했는데, 1회 구매 시 평균 복권 구매 금액은 로또복권 8,694원, 연금복권 7,609원이다. 2017년 온라인복권 판매액은 약 3조 8000억 원으로 3년 전인 2014년보다 24.9%나 늘었다. 그러니까 매주 730억 원어치씩의 복권이 판매된 것이다.
넉넉지 않은 이들은 꿈이라도 꾸려는지 그렇게들 복권을 사면서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있는 이들의 돈질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니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커지고, 계층 간의 위화감도 따라서 커지며, 돈에 따라 사법부의 판결과 권력의 유무가 결정된다고들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돈은 사람에 앞서 행세하려 하는 속성을 갖는다. 국민이 힘겨운 살림살이로 고통 받는 때에는 더욱 돈의 행세가 가까이 느껴진다. “젊은 사람은 돈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돈이 전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갈수록 실감 나게 다가온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돈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갖지 않고 거기에 매달려 아웅다웅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물론 아니라고들 답하겠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견지해야 그나마도 복잡하고 험한 세상에서 중심 잃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일은 누구나 한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먹고 살고,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잘 모시고, 노후대비를 하고,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재미있게 노는 게 목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만약 돈벌이가 되는 그 일이 즐겁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프로'라고 한다.”
유시민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일상적인 삶을 사는 데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고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래서 모두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세상에 돈이 목적이라고 하면 얼마나 허망하고 슬픈 일인가. 수단인 그 돈을 벌면서 즐거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지 않을까. 돈은 수단이라는 분명한 사실만은 새겨두고 살아야 인간적인 삶이 되지 않겠나.
<노랑생각> 김성현, 진인진, 20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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