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의 종말'과 '선택의 자유'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인간적인 행위는 경쟁이다. 찰스 다윈에 따르면 생물의 삶 자체가 '생존경쟁'이니 어쩌면 시장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인류의 경쟁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은 유별나다. 생산에 관한 모든 그래프, 예컨대 인구의 숫자라든가 1인당 섭취하는 칼로리, 에너지 소비량 등은 인류 역사 대부분 기간에 거의 수평선을 그리다가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한결같이 수직 상승한다. 이런 경이로운 발전에 관한 극찬을 가장 많이 담은 책 한 권을 고른다면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이 꼽힐 것이다.
경쟁은 인간의 물질적 삶을 풍요로 이끌었다. 그러나 언제나 경쟁이 괜찮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경쟁의 종말>에서 코넬 대학의 로버트 프랭크 교수는 사회 전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경쟁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예컨대 화려하고 큰 수컷 공작의 꼬리, 수컷 코끼리 물범의 엄청난 체중, 수컷 말코손바닥사슴의 뿔이 그러하다. 이런 육체의 진화는 생산력 높은 암컷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 진화 경쟁의 결과, 종 전체가 사자와 같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아졌다. 경쟁의 결과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쟁이란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해진 끝이 있을 수 없는 상대적 지위 경쟁, 그리고 그 결과(등수)에 따라 보상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경쟁이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치르는 경쟁이 딱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은 우리 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훨씬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옆자리 아이와 경쟁하고 있다. 그 결과는 아이들의 창의력 고갈, 교육에 의한 세습 귀족의 탄생, 그리고 출산율 저하다. 한국 사회의 퇴보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 확인된 상대적 자유 경쟁은 비효율의 원천이고 뒤에서 보듯이 공공성과 환경에 치명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과 직업에 따라 삶이 천양지차로 갈린다. 사회의 불평등이, 보통 사람은 질 수밖에 없는 경쟁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 경쟁의 결과는 절망의 구렁텅이다. 아이들이 맞닥뜨릴 각종 함정 역시 우리 세대의 잘못된 경쟁이 만들어 놓았다. 평생 저금만 해도 살 수 없을 만큼 높아진 집값, 청년들이 한없이 취직 준비만 하도록 만드는 직업의 양극화 역시 바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죽도록 경쟁한 결과가 아닌가?
만일 교과서 말씀대로 직업의 귀천이 없다면, 나아가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든 삶에 별 차이가 없다면 왜 이런 바보같은 경쟁을 하는 것인가? 자기가 하고싶은 공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물질적 보수와 사회적 인정을 합해서 큰 차이가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즉, 일자리가 평등하다면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직업을 선택하면 된다.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원리인 '선택의 자유'를 정치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평등한 나라에 더 많다. 북유럽 나라들은 현실에서 이 명제를 실증하고 있다.
정태인 이수연 <협동의 경제학> 2013. 레디앙.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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