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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유태인의 정체, 혈통이냐 종교냐 - 갈등의 핵 유태인

by 길찾기91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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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정체
– 혈통이냐 종교냐

1950년 신생 이스라엘 의회에서 첫 번째로 통과한 법으로 ‘귀환의 법’이 있다. 이 법은 유태인이면 누구나 이스라엘 땅을 밟는 즉시 시민권이 주어진다는 내용의 법이다. 이 법에 의해 수많은 해외거주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도착 즉시 신생 이스라엘 시민권이 주어졌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으나 오갈 곳 없는 사람들 및 전쟁 중에 삶의 뿌리가 뽑혀 이렇다 할 거주 지역이 없어져버린 사람들이 무리지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이 ‘귀환의 법’을 통해 유입된 인구로 인해 이스라엘의 인구는 건국 이후 만 5년을 넘어서면서 배로 늘어났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유태인 정의에 문제가 생겼다.
다니엘 루훼이슨이란 유태인이 시민권을 신청했는데 기각된 것이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자신이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어엿한 유태인인데 어째서 시민권이 거절되었냐고 항의했다. 이 문제는 대법원까지 상고된 법정투쟁으로 이어졌으나 끝내 거절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이 법이 규정한 유태인의 정의는 혈통이 아니라 유태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유태교도로 본다는 해석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혈통으로 보아 유태인이라도 유태교도가 아니면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이슬람교도 아랍인까지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아 법 해석에 대한 이론의 여지가 잠재한다. 오늘날의 유태인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정체성 문제인데 앞으로도 논란의 소지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태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루훼이슨은 귀환의 법이 아닌 일반 외국인으로서 만 3년 이상 거주자에게 주어지는 시민권 신청이라는 창구를 통해 법무부의 심사를 거친 후 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아주 대비되는 이야기가 있다. 예멘과 에티오피아 유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에 있고 에티오피아는 중앙아프리카에 있다. 인종으로 보아 흑인이기에 혈통으로 보아 전통적안 유태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들은 동포로 인정돼 이스라엘 도착 즉시 귀환의 법에 의해 시민권이 주어졌다. 예멘의 경우는 아예 이스라엘 공군기가 이들을 실어 날랐다. 이 예멘 유태교인의 이스라엘 공수는 ‘마술융단작전(operation of magic carpet)’으로 알려졌다. 신생 이스라엘이 외국에서 흩어져 사는 천대받아온 유태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
오늘날은 혈통보다 유태종교가 우선시된다. 핏줄보다 신앙이다. 이 점에서 과거에 크게 다르다. 역사 속의 유태인은 유태인 부모가 낳은 종족이면 누구나 유태인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알았고 이민족들도 그렇게 보았던 것이다. 출애굽기 속의 유태민족이란 혈통이 전부였다. 그 이후 가나안에서 왕국을 건설한 유태인들은 때때로 유태교를 잊고 살기도 했다. 야훼 하느님이 선택한 선민이란 혈통 단위로 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유태인만큼 핏줄을 중요시한 민족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가는 듯하다.

- 모계냐 부계냐

엄격한 혈통주의를 오늘날의 유태인들에게서 찾는다면 좀 어려울 것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태인들의 피도 어지간히 혼혈이 되었고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시냐고그에 등록을 한다든가 유태교의 제반 율법을 지키면서 생활하는 사람이라야 유태인이라는 범주에 넣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어엿한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도 유태교와 멀어져 있는 듯이 보이면 유태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유태인들도 많다. 쉽게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혈통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이 유태인 사회의 통념이다.
유태인 스스로도 유태인의 정의가 애매하다고 한다. 오늘날 유태인들은 대체적으로 유태인의 정의를 세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 유태교를 믿고 그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는 사람. 둘째, 부모가 유태인인 사람. 셋째, 유태인의 전통유산과 그 관습에 젖어 있으며 유태인 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해온 사람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인 세 가지 범주로 보는 유태인의 정의이다.
그러나 이런 범주 역시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다. 가령 혈통을 보더라도 양쪽 부모 가운데 어느 편을 더 우선시하느냐의 문제다. 기원전까지만 해도 부계를 우선시했는데 디아스포라 시대를 거치면서 유태인의 혈맥은 부계보다 모계를 우선시하게 됐다. 즉 어머니가 유태인이어야 진짜 유태인으로 보게 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현대유전학에서도 혈통 유전은 모계로부터 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혈통이나 문화적인 유태인 정의와는 관계없이 히틀러는 3대나 경우에 따라 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양측 부모 가운데 어느 한 편에라도 유태인 피가 흐르면 유태인으로 간주했고 집단수용소로 보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닙니다”라고 발버둥쳐도 소용없었다. 혈통을 우선시한 관례에 따른 것이다. 가령 할아버지 때부터 타종교로 개종했어도 유태인으로 보았다.
유태교라는 종교를 혈통보다 앞서 보는 방법은 더 큰 혼란을 가져올 듯하다. 왜냐하면 유태교의 교파에 따라 교리상의 간극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골수 정통파 유태교에서는 보수파나 개혁파 유태교를 진정한 유태교로 보지 않는다. 더욱이 개혁파 유태교에 이르러서는 아예 유태교의 문전에도 들어서지 못할 이단이라고 못박는 정통파 유태교 랍비가 많다. 그런가하면 자신을 태생 유태인이며 유태교도라고 자칭한 유태인들이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이른바 ‘하시드’로 알려진 정통파 종파의 유태인들을 가리켜 ‘돌다시피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2001. 효형출판. 21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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