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건국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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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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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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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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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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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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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학교
- 가족
- 아버지 : 정일형 (鄭一亨, 1904년 2월 23일 ~ 1982년 4월 25일)
- 어머니 : 이태영 (李兌榮, 1914년 8월 10일 ~ 1998년 12월 17일)
- 장남 : 정호준 (鄭皓駿, 1971년 2월 19일 ~ )
- 2019.03.~제5대 소강민관식육영재단 이사장
- 2018.02.~민주평화당 상임고문
- 민주당 상임고문
- 2011.~민주통합당 상임고문
- 2008.~2011.민주당 상임고문
- 2007.~제17대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 총괄선대위원장
- 2007.~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
- 2007.~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 창준위 상임위원장
- 2003.~한국장기협회 총재
- 2004.~열린우리당 상임고문
- 2003.~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 2002.~제16대 대통령선거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 2000.~2004.제16대 국회의원
- 2000.~2003.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1998.~제11대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 1997.~국민회의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
- 1996.~국민회의 제15대 총선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1995.~2000.국민회의 부총재
- 1994.~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장
- 1993.~1995.민주당 상임고문
- 1992.~1993.민주당 부총재
- 1992.~1995.제14대 국회의원
- 1990.~평민당 사회담당 총재특보
- 1988.~국회 언론청문회 위원장
- 1988.~1990.국회 문교공보위원회 위원장
- 1988.~평화민주당 정책위의장
- 1988.~1992.제13대 국회의원
- 1987.~평화민주당 대변인
- 2003.~열린우리당 상임고문
- 1985.~1987.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 1978.~1980.제10대 국회의원
- 1977.~1978.제9대 국회의원
- 1975.~1977.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 정치학 강사
- 전직 국회의장 등 여야 정치 원로 11인이 양극단으로 흐르는 한국 정치를 바로잡고 협치 복원을 논의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
국민의힘 신영균 상임고문과 더불어민주당 권노갑 상임고문 등이 주축이 된 원로회는 제헌절인 17일 첫 모임을 갖고, 매달 1회 정기적으로 모이기로 했다.
모임에는 두 상임고문 외에도 강창희·김원기·김형오·문희상·박희태·임채정·정세균·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전직 의장 8명과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등 11명이 참여한다. 이날 첫 모임에는 박희태·임채정·정의화 전 의장을 제외한 8명이 참석했다.
김형오 전 의장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오늘 모임에서는 대체로 한국 정치의 복원을 강력히 염원한다는 데 공감했다"며 "정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국회라는 데도 인식을 같이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여야 간 대화가 최우선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대통령께서도 국회를 존중하고 접촉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며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여야 지도부에도 의견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김 전 의장은 "11인 원로회'의 공식 명칭을 매달 셋째 주 월요일에 만난다는 의미에서 '3월회'로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 연합뉴스 2023.7.17
- 대한민국 전직 국회의원들의 친목 모임으로 현실정치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대한민국 헌정회의 화려한 변신이 화제다. 정대철 회장을 수장으로 만나면서 MZ 세대 못지않은 에너지를 발휘하며 그동안 국회내 ‘파고다 공원’으로까지 희화화되던 설움을 씻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따른다.
특히 30대 금배지로 시작해 5선 관록을 쌓으며 46년 정치 여정을 이어온 거장의 울림이 역할을 했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실제 지난 3월 ‘국가 원로 단체로서의 헌정회 위상 재정립’ 등의 공약으로 정 회장이 당선된 이후 김진표 국회의장이 찾아와 ‘정대철 헌정회’ 출범에 힘을 싣는 진풍경이 있었다.
정 회장이 취임 일성으로 ‘정책대안 제시와 정치선배, 원로로서 충고와 진언을 아끼지 않는 헌정회의 역할’을 강조했던 그가 오는 17일 ’11인 원로회‘ 출범을 공식화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돼야 할 부분이다. 구순을 넘긴 신영균ㆍ권노갑 여야 상임고문을 비롯해 김원기ㆍ김형오ㆍ문희상ㆍ정세균ㆍ정의화(참석 의사 밝힌 강창희ㆍ박희태ㆍ임채정) 등 전직 국회의장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던 건 정대철 헌정회장이라 가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마주한 정대철 회장은 세월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품은 원칙주의자의 꼿꼿한 내공은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현실정치를 논하는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고 대통령을 향한 조언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야당은 다수의석을, 여당은 사법 권력을 앞세우는데 가능한 안 써야 하고 마지막 수단이어야 할 힘의 논리에 너무 쉽게 기대려 한다”고 우려하면서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진영논리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라고 날을 세웠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권력과 정보가 집중되니 뭐든 다 안다는 생각에 남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야당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대통령이 특별히 여소야대 현실에서 가능한 많은 야당 인사들을 접촉해야 하는데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고 있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가 형사 피의자라 안 만난다는데 결국 윤석열 대통령 책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는 “대통령이 안 만나면 여당에서라도 만남에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눈치만 보고 있다”며 “한발짝씩 서로 물러나 상대방 입장을 인정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하고 특히 대통령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시민일보 2023.7.13
-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30대부터 부친을 따라 민주당계 진영 정치인으로 살았음에도, 선배이자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던 김대중과 중년에 정면대립했던 몇 안되는 인물이다.
- 아버지 정일형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1977년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그해 6월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1978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 민주공화당 민관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윤형의 자주구락부 계보에 속하였으며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다.
1980년 5.17 내란 후 신군부로부터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2년 미국 미주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하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신한민주당 이민우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화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 그러나 대선 직후 야권이 패배한 주요 원인이 후보 단일화 실패에 있었음을 지적하는 ‘나의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해 파란[7]을 일으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평화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 국회 문화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문화공보위원장으로서 5공 청문회를 통해 1980년의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에 대한 진상 규명에 노력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1991년 광역의회선거 참패 후 노승환, 조윤형 등과 함께 김대중 총재의 2선 퇴진과 야권통합을 촉구하는 ‘정치발전연구회(약칭 정발연)’ 모임을 주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하였다. 그리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현과 영합하여 김대중을 비방하는 네가티브 홍보전략(대통령은 김상현, 총재는 정대철, 국민회의가 다 김대중 총재 것이라고 하는 색깔을 지우자)을 써서, 김대중의 뒷목을 잡게 하였다는 후일담이 있다. 1998년 KBO 총재에 취임하였으나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면서 곧 사퇴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8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다시 선출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말 열린우리당 분당 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004년 1월 소위 '굿모닝시티 로비 사건'으로 인하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면서 10년간 피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노계와는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그 후 지역구를 장남 호준에게 물려주고 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2016년 1월 탈당, 안철수가 주도하는 국민의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했다...가 공천탈락되면서 결국 국민의당으로 갔다.
이후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권노갑, 이훈평 등과 함께 동교동계의 원로로 있었으나, 통합을 추진하는 안철수 대표에 반발하여 민주평화당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평화당 내에서 정동영을 위시한 당권파와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한 비당권파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고문단 중재안을 내놓는 등 당내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2019년 9월 20일 권노갑 등과 함께 탈당했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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