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이야기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by 길찾기91 2020. 12. 2.
728x90
반응형

 

덩굴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살아간다. 숲 위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덩굴 씨들은 싹을 쉽게 틔우지만 뿌리를 내리는 일은 드물다. 유연하고 녹색을 띤 이 덩굴 싹은 의지해서 자랄 수 있는 틀을 미친듯이 찾는다. 자신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제공해줄 틀을 찾는 것이다. 덩굴은 빛이 있는 위쪽으로 도달하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해 투쟁을 한다. 그들은 숲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제일 좋은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잎은 다른 제일 좋은 자리, 보통 몇 나무 건너에 만든다. 덩굴은 지상의 식물 중 유일하게 위보다 옆으로 더 많이 자라는 식물들이다. 덩굴은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빛 한 줌과 비 한 방울을 훔친다. 덩굴들은 사과하는 태도로 공생관계에 들어가는 대신 기회가 닿는대로 크게 자란다. 감고 올라가는 틀이 죽는지 사는지 별 상관이 없다.

 

덩굴의 유일한 약점은 그것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무만큼 크게 자라기를 절박하게 원하지만, 그것을 고상하게 실현하는 데 필요한 빳빳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햇빛을 찾아가는 방법은 목재를 길러서가 아니라 순전히 악력과 뻔뻔스러움을 동원해서다. 담쟁이덩굴 한 그루는 무엇이든 감싸고 달라붙도록 프로그램된 수천 개의 초록색 덩굴손을 가지고 있다. 덩굴손에 닿은 것이 덩굴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거나 혹은 적어도 튼튼한 것을 만날 때까지 벼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변신술을 지닌 변절자들이다. 덩굴손에 흙이 닿으면 뿌리로 변하고, 덩굴손에 바위가 닿으면 흡입컵울 만들어 단단히 붙는다. 덩굴은 무엇이든 필요한 것으로 변신하고, 자신의 엄청난 허세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한다.

 

덩굴식물들이 사악하거나 해로운 존재는 아니다. 다만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야심찰 뿐이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식물들이다. 덩굴은 해가 쨍하게 나는 여름날 하루에 30센티미터 이상 자랄 수도 있다. 덩굴의 줄기에서는 식물에서 측정된 것 중 가장 높은 물 이동률이 관찰되기도 한다. 가을에 덩굴옻나무 잎이 몇 개 빨강이나 갈색이 된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 식물이 죽어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저 다른 색소로 속임수를 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덩굴식물은 상록수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이 힘들게 감고 올라간 낙엽수들처럼 긴 겨울 휴가를 즐기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 더해 덩굴식물은 숲의 이파리 지붕 맨 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강한 개체들만 후손을 퍼뜨리고 살아남아왔다.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알마, 2017. 180-181.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