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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검찰 개혁의 실패 - '운명이다' 인용, 노무현

by 길찾기91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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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의 실패

 

권력기관의 정치적 독립 또는 중립화와 관련하여 국가정보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검찰 조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민변이 국민의 정부 개혁 과제를 제안했는데, 첫번째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민변이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 주된 이유가 검찰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내내 검찰의 정치적 독립 요구를 외면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검찰 인사 개혁안을 준비했다. 그런데 당시 검찰 수뇌부가 사실을 왜곡하면서 인사 개혁에 대한 검사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나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화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9일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텔레비전 방송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토론했다. 검사들의 인사에 대한 오해와 불만을 해소하는 것과 함께, 젊은 검사들이 정치적 독립의 충정을 토로하면 공감을 표시하고 필요한 약속을 하려고 했다. 검사들이 미리 모여 준비를 해서 나온다고 들었다. 토론을 시작하자 검사들이 처음부터 인사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그런데 다른 검사가 또 인사 문제를 제기해서 다시 마무리를 하고 나면 또다른 검사가 또 제기하고 해서, 그래서 결국 인사 이야기에서 뱅뱅돌다가 토론이 끝나고 말았다. 대표로 토론에 나오면서 대통령 앞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인사 문제를 제대로 충언하라는 주문을 받은 모양인데, 결국 돌아가면서 준비해 온 말만 되풀이했던 것이다.

 

무척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검사들이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을 온 국민에게 보여 줌으로써, 적어도 내가 검찰을 정치적으로 악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해소하는 효과 정도는 있었다. 나는 검찰의 중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도 부당한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검찰 개혁의 두번째 과제는 검찰권 행사에 대한 민주적 통제였다. 사실 검찰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이다. 기소독점권을 가지고 있어서 기소권을 부당하게 행사하거나 행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 검찰의 과거사를 보면 그런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특히 검사와 검찰 직원들의 불법 비리는 검찰 스스로 수사하고 기소하지 않는 한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이 자기 자신의 불법 행위를 엄정하게 수사하고 기소할 리 없다. 검찰은 권위주의 시대 인권 탄압에도 앞장섰다. 수사기관이 무고한 사람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 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자백을 근거로 아무 증거도 없이 간첩이나 이적단체로 기소한 사건이 부지기수였다. 참여정부가 만든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서 진상조사를 해서 법원에 재심을 권고한 사건이 많았다. 그 피해자들이 재심을 신청해서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 사건을 만든 장본인이었던 검찰은 과거사 정리와 그에 대한 반성을 끝까지 거부했다. 국정원과 경찰청 등 다른 권력기관들이 모두 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조사를 하고 국민 앞에 사과했지만 검찰만큼은 오불관언이었다.

 

검찰 조직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서 두 가지 제도 개혁을추진했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만들어 수사권을 주는 것이었다. 고위공직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공수처가 수사를 하여 검찰에 이첩해 기소하게 하고, 만약 검찰이 부당하게 기소를 하지 않으면 법원이 기소를 강제하도록 재정신청을 하게 하는 제도이다. 공수처가 수사 대상으로 삼는 고위공직자에는 검사들도 포함된다. 두 법안 모두 열심히 공을 들였지만, 여야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협조해 주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무조건 반대했다. 검찰은 조직의 역량을 총동원해 국회에 로비를 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 정치인이라 그런지, 행정자치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국회의원들이 미적미적 심의를 미루었다. 여당 국회의원들도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 된다는 것이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 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공수처 수사 대상에 국회의원을 포함시킨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면, 국회의원을 빼고서라도 제도 개혁을 했어야 옳았다.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 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국세청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대통령으로 일하는 동안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일에 국세청을 동원하지 않았다. 야당정치인을 후원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세무조사를 한 적도 없었다. 정치적 세무조사를 하지 못하게 했고 기업에 대한 정기세무조사나 특별세무조사도 정치적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따르게 했다. 국세청 스스로 이런 문화와 관행을 축적해 나가면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착각이었다.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과 투명성을 보장하려는 뜻이 없을 때 국세청과 같은 관료조직은 하루아침에 정치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청와대를 떠난 후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했던 기업인들이 숱하게 특별세무조사를 당했다. 검찰 수사까지 받아 회사가 망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다르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말하는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려 했던 나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아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

 

운명이다,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돌베개, 2010. 272-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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