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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검사들은 왜 구속수사에 목맬까?

by 길찾기91 2020.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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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들은 왜 구속수사에 목맬까?

 

좀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05~2014년 10년간 검찰 조사를 받다 자살한 사람이 90명에 달했다. ‘윤석열 검찰’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적 사건’ 수사와 관련해 자살한 피의자만 해도, 이번 여당 대표의 측근까지 포함해 벌써 5명째다. 자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구속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도 그중 하나다. 윤석열 총장의 직무 복귀 후 첫 작품이 원전 비리 관련 공무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결재였다. 이를 보면서, 새삼 검찰의 구속수사 관행에 대해 생각해봤다. 대체 검찰은 왜 그렇게 구속수사에 목을 매는 것일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수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신구속을 당한 피의자는 공포감과 압박감, 불안감에 검사에게 협조할 개연성이 크다. 그 과정에 종종 회유와 거래가 발생한다. 둘째, 구속을 죄의 경중을 가리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속은 무거운 범죄로, 불구속은 덜 무거운 범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셋째, 구속이 곧 처벌이고 정의 실현이라는 단죄의식 탓이다. 범죄 혐의자가 법적 심판을 받는 곳은 법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검사가 심판관 노릇을 한다. 인신구속을 주된 무기로 삼아. 넷째, 그 자체로 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조폭세계에서 수감경력인 ‘별’ 숫자가 위력을 발휘하듯이 검사 세계에서 구속자 수는 훈장으로 통한다. 특히 대중의 눈길을 끄는 정ㆍ관ㆍ재계 거물급 인사를 많이 구속하면 이름도 날리고 요직에 진출하는 데도 유리하다. 언론으로부터 ‘실력 있는 검사’라는 평가도 받는다. 덤으로 나중에 유능한 ‘전관 변호사’로 거듭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권력관계에 따른 지배심리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포승줄에 묶여 검사실로 들어서는 피의자는 철저한 약자다. 대체로 검사에게 복종하거나 굴종하게 된다. 나는 검찰 취재 중 우연히 한 시대를 풍미한 조직폭력 대부가 검사 앞에서 절절매는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죄수복에 고무신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취재 관계로 잘 아는 사이인데다 평소 자신감이 대단했던 사람이기에 서로 눈빛이 마주치자 민망했다. 검사가 불구속 상태로 수사해도 되는 유명 연예인을 굳이 구속하는 데도 그런 지배심리가 작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구속된 피의자의 심리와 관련해 취재비화 하나가 떠올랐다(나이가 들어가선지 요즘 자꾸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많다). 2009년 5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직후 박 회장의 변호인한테 직접 들은 얘기다(박 회장은 올해 1월 사망했다).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받은 자신의 의뢰인을 위한 변명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검찰의 반인권적 수사 관행과 관련해 귀담아들을 구석이 있다.

 

“구속되면 어쩔 수 없이 불게 돼 있다. 검찰이 매일같이 불러댄다. 구치소에서 별 보고 나왔다가 별 보면서 들어간다. 신문을 해도 괴롭고 가만히 둬도 괴롭다. 굉장히 불안한 심리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집중력과 체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게 된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검찰에 불려가면 하루도 못 견뎌 불게 돼 있다. 박 회장 아들이 어리다. 방위사업체 특례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체했다. 검사가 ‘한번 파볼까’ 했을 수 있다. 그러면 부정이 있든 없든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半)공갈과 협박. 그렇게 안 하면 수사가 안 된다.”

 

그는 박 회장에 대한 검찰수사를 ‘문어발식 수사’라고 규정하면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욕심이 나서 자꾸 일을 벌였다”고 개탄했다. 물론 당시 내가 접촉했던 수사라인 검사들 논리는 달랐지만.

 

범조국 사태(유재수 감찰 무마,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 포함)만 봐도, 검찰의 무절제한 수사만능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이를 검찰 독립 또는 중립과 동일시하는 검사들의 집단항명은 조직이기주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조국 전 장관이 갈파한 대로 검치(檢治)와 법치(法治)를 구분하지 못한 채, 고전적인 권력비판 논리에 사로잡혀 정권을 향해서만 선비 같은 훈계를 늘어놓거나 기계적인 양비론으로 본질을 흐리는 지식인들 보면 안쓰럽다. 말재주나 글재주에 취해 요설로 대중을 현혹하는 자들도. '수사내용=사실보도’라는 확증편향에 빠진 친검(親檢)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택적 정의로 국가권력을 국가폭력으로 변질시킨 야만의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단죄의식에 사로잡혀 구속 여부에 열광하거나 분노하는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진보/보수(혹은 수구), 개혁/반개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는 선명해서 좋지만, 감정에 치우쳐 합리를 가릴 때가 많다. 저쪽을 치는 건 다 정의이고, 이쪽을 치는 건 다 불의라는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석열 검찰’로 상징되는 검찰지상주의를 청산하면서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반성 없는 진보는 반대쪽과 마찬가지로 오만과 독선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전쟁 중이니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논리와는 별개다. 옳은 방향이니 밀어붙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반 가까이 있다는 걸 도외시하는 태도는 전략적으로도 좋지 않아 보인다.

 

과정과 방식을 두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검찰개혁은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라는 표현이 시대정신에 맞는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탄생했다. 국민과 한 약속을 이행하려는 정부의 합법적 권한 행사에 해당 공무원 집단이 저항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검사들의 마음을 얻는 개혁을 추진하면 좋겠다"는 대검 차장의 건의는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인 얘기다.

 

켜켜이 쌓인 과오에 대해 국민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이 순서다. 수사권을 무기로 떼지어 무력시위를 벌이거나 조직이익을 앞세워 상사에게 몰려가 사표를 요구하는 건 볼썽사납다. 검찰을 위한 검찰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검찰로 거듭나는 길이 뭔지 숙고해야 할 때다. 어느 조직이든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는 강경파에 묻히게 마련이다. 그래도 그런 검사들이 중심을 잡아주면 좋겠다. 조직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불합리한 구속수사 관행도 개선하고.

 

조성식 기자 20. 12. 8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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