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착각 - 기자와 검사
아주 어릴 적 내 꿈은 사회부 기자였다.
매일 신문을 읽는 부친의 모습을 보며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기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공부(?)도 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하는 장르물이 있어서 간접적으로라도 배울 여건은 아니었으나 사회부 기자가 멋져 보였다. 아마도 정의감에 불타는 멋진 어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검사가 멋져 보이던 때도 있었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일거라 짐작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당연히 윗전의 압력도 있을테고, 지인들의 청탁도 들어올테지만 그걸 다 이겨내는 멋진 검사가 이 사회를 지키는 보루라고 생각됐던 때다. 자신이 직접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면 가까운 이들을 다 외면하고서라도 기어이 처벌하는 그런 멋진.
대학생이 되면서 내가 그간 가졌던 두 직군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인권이니 정의니 하는 단어는 책에만 나오던 시절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군사독재 시절을 사는 대학생의 눈에 검사는 권력의 주구였고, 기자는 눈치를 보고 기생하는 존재였다. 권력이 얼마나 두려운 상대인지는 나도 안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젊은 의협심은 싸워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난 그래서 당당하다.
사회인이 되어 만난 기자와 검사는 일찍 기대를 접은 게 맞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이들이었다. 물론 게 중에는 간간이 올곧은 사회부 기자도 있고,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검사가 있긴 했다. 소수인 게 아쉬웠지만 그들마저 없었더라면 지금의 세상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늘 소수에 의해 물길이 바뀌었으니까.
중년의 세월을 살며 바라보는 기자와 검사에 대한 인식은 이제 바닥을 친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존재들. 외면이 아니라 아예 삭제시켜야 할 존재들로 보이는 이들을 많이 본다. 군사독재 시절엔 그 권력이 두려워 조심했다 치더라도 지금은 그런 세상도 아닌데 바른 말을 않고, 바른 길을 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알고 보면 권력보다 돈이 더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내 시각이 틀린 것이길 바라며 짐작하는 바는 이렇다. 신문사는 기업이다. 상당수는 건설업과 관계가 깊다. 비뚤어진 권력은 기자들과 공존하려(겉으로는 공존이라 하지만 내심으로는 아래로 보며 돈으로 관리하는) 한다. 기자들은 정의감있는 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으로 그 직장의 수입을 위해 일한다. 가끔은 신입들이 용감하게 나대지만 결국 데스크가 관리하면 다들 익숙해지고 만다. 여기에 정의는 자리 잡기 어렵다. 신문사가 망해서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는 게 두려운 순응하는 양이 된 기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갑자기 용기가 생겨 칼을 들이댈 수 있는 것은 잡혀갈 일이 없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이다. 회사도 안 망한다고 믿어지겠지. 의협심 같은 건 아예 그들의 사전에 없다.
검사는 또 어떤가. 나름 실력있는 이들인 그들은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한 능력자들이다. 그 좋은 머리를 좋은 데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검사가 되고 나면 조직에 충실해진다. 경주마가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가리개를 사용하듯 윗선에서 신입들을 길들이고 앞만 보고 달리게 만든다. 뒷 일은 내가 책임져준다며. 검사들이 사법처리 되는 일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같은 정도의 사안에서 검사들이 처벌받는 수위는 아주 낮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그들만의 사회에서 서로 붙잡아주는 미덕(?)이 있는 탓이다. 그 끈끈함은 공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다. 아예 평생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엔 국가 공무원으로 국가에 복무한다는 자세가 자리 잡기 힘들다. 가진 권한의 극대화를 이루고 자신들이 이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사고체계가 고착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가진 그들의 독점적 지위는 정말 막강하다. 기소독점권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권한인가. 기소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죄에 대해 처벌을 하는 게 그들의 일인데 기소를 안한다는 것은 결국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그들 마음대로. 그것도 선택적으로.
검사도 무뢰한 권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다. 하지만 민주적 사고와 행정을 하는 정권이 들어서면 무섭게 돌변한다. 여기서 정의감이니 의협심이니 국민의 공복이니 하는 말은 사치다. 게 중에는 이 모습을 아파하며 변화를 갈구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지만 대부분은 동일체로 살아간다.
검사의 사고 속에 고위공직자가 받는 예우는 그렇게 큰 게 아니다. 전관으로 누릴 미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인 수준이니. 평생을 주거나 받거니 하며 서로를 끌어주는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아주 특별히 훌륭한 사람이 아닌 바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이들에 대해 군사독재 시절의 대학생들은 ‘권력의 주구’라 불렀다.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 게 적당할까.
기자와 검사에 대해 오래도록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수많은 이들에게 이들의 삶은 말한다. 오래된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삶으로 커밍아웃하는 그들을 보며 아무런 연민의 감정이 들지 않는 건 내가 야박한 사람이어서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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