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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가방에 바퀴 다는 데 왜 5000년이나 걸렸을까? - 지구를 구할 여자들, 카트리네 마르살

by 길찾기91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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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바퀴 다는 데 왜 5000년이나 걸렸을까?

 

여행 가방이 시장의 저항에 부딪힌 것은 젠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작은 요소 하나가 바로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달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한참 고심한 경제학자들이 놓친 것이었다.

사람들이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 가방이 남성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명백히 괴상한 일이다. '진정한 남자는 가방을 직접 든다'라는 무척이나 자의적인 개념이 이제는 누가 봐도 명백한 혁신을 방해할 만큼 강력했다니? 남성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가 돈을 벌겠다는 시장의 욕망보다 더 완강한 것으로 드러나다니? 남자는 무거운 짐을 들 수 있어야 한다는 유치한 생각 때문에 전 세계 산업을 뒤집을 상품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바로 이 질문들이 이 책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세상은 특정 남성성 개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는 채소를 먹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사소한 문제로 건강 검진을 받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섹스할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다' 같은 믿음이 말 그대로 매일같이 피와 살이 있는 진정한 남자들을 죽이고 있다. 남성성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고집스러운 개념이며, 우리 문화는 종종 특정 남성성 개념을 보존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성성 개념은 5000년 동안 기술 혁신을 방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혁신과 젠더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1972년의 바퀴 달린 여행 가방 광고를 보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한 여성이 커다랗고 침침한 가방을 힘겹게 나르고 있다. 그 여성은 흑백이며, 과거를 상징한다. 그때 미래가, 중성적인 갈색 양복을 입고 스카프를 넥타이처럼 목에 두른 여성의 모습을 하고서 과거의 옆을 지나간다. 현대성을 상징하는 이 여성은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시선은 저 높은 곳의 자유를 향한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이 유행한 것은 사회가 바뀌고 난 후였다. 1980년대가 되자 여성의 짐을 들어 줄 남자, 들어 줘야 한다고 기대되는 남자, 또는 여성의 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충분히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질 남자 없이 홀로 여행하는 여성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에는 더 큰 기동성이라는 여성의 꿈이 담겨 있었다. 여성이 남성의 호위 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된것이다.

마이클 더글러스와 캐슬린 터너가 출연한 1984년의 할리우드 영화 <로맨싱 스톤>에서 터너가 연기한 인물은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끌고 정글로 들어간다. 새도우가 발명한 것처럼 길이가 긴 쪽에 바퀴가 달린 가방으로, 터너는 끈을 이용해 앞에서 이 가방을 끌고 있다. 터너의 가방은 무성한 열대 식물 사이에서 끊임없이 넘어져 더글러스를 분노하게 한다. 한편 더글러스는 덩굴을 타고 전설 속의 거대한 에메랄드를 찾아 헤매며 악당에게서 자신과 터너를 구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터너의 여행 가방은 농담이다. 계속 실패하는 농담 말이다.

이것이 새도우의 초기 모델이 가진 큰 문제였다. 길이가 짧은 쪽이 아닌 긴 쪽에 바퀴가 달려 있었기에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사용자는 가죽끈으로 뒤에 있는 가방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능하면 매끈한 바닥 위에서 끌어야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덴마크의 가방 회사인 카발렛은 길이가 짧은 쪽에 바퀴를 달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방 산업의 거인인 샘소나이트가 원래의 바퀴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에 이 형태가 계속 표준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에 미국의 항공기 조종사인 로버트 플라스가 현대식 기내용 가방을 발명했다. 그는 새도우의 가방을 옆으로 돌리고 크기를 줄였다. 바퀴가 마침내 가방 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신제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유행을 일으켰다. 처음에 이 가방은 항공사 승무원에게 판매되었다. 승무원들은 화려한 유니폼을 입고 매끄러운 공항 바닥에서 가방을 끌기 시작했고,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도 하나 갖고 싶어 했다.

곧 모든 가방 회사가 이 선례를 따랐고, 여행 가방은 손잡이로 들던 것에서 끌고 다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변화는 비행기와 공항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산업 자체를 재건하고 재고해야 했다. 시장 전체가 뒤바뀌었다.

플라스의 기내용 가방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시간대의 특색 없는 공항 바닥을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와 함께 현대 사업가라면 늘 빠짐없이 갖추어야 할 무기가 되었다. 이 가방은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남성들은 3센티미터 크기의 바퀴 몇 개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 보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은 위협을 느꼈다.

우리는 인류가 달에 다녀오고 나서야 남성성 개념에 도전할 준비를 끝내고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달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제품에 투자하지 않으려 했던 백화점 바이어들은 젠더 역할이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대 여성은 혼자 여행할 수 있기를 바랐고, 남성은 더 이상 원초적인 완력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할 능력은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등장에 꼭 필요하지만 빠져 있던 요소였다. 우리는 우선 가방을 직접 나르기보다 편리함을 우선하는 남성 소비자를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혼자 여행하는 여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후에야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진면목을, 너무나도 명백한 그 혁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승무원이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진정한 선구자가 된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가장 먼저 대규모로 이 제품을 사용했고, 공항을 우르르 걸어가면서 살아 숨 쉬는 무료 광고 역할을 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여러분도 추측했겠지만)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었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이러한 여성들 수가 늘어났을 때 돌파구를 찾았다.

요컨대 여행 가방은 우리가 젠더에 대한 관점을 바꾸었을 남자가 짐을 들어야 하고 여자의 기동성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바닥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젠더는 왜 가방에 바퀴를 달기까지 5000년이 걸렸느냐는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이 답이 놀라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프트'한 것(여성성과 남성성 개념)이 '하드‘한 것(끊임없는 기술 발전)을 저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여행 가방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얼어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젠더 관점은 매우 강력한 것이 분명하다.

지구를 구할 여자들, 카트리네 마르살, 부키, 2022, 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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