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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여자가 뛰고 있다 - <친애하는 슐츠씨> 박상현

by 길찾기91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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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뛰고 있다

 

여성이 운동하는 것에 대한사회적 반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67년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첫 공식 여성 완주자가 된 캐서린 스위처가 겪은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보스턴 마라톤을 제일 처음 완주한 여성은 로버타 깁(Roberta Gibb)이다. 깁은 스위처보다 한 해 앞선 1966년에 이 대회를 완주했다. 깁은 스위처가 참가한 1967년 대회에도 참가해 스위처보다 거의 한 시간 빠른 속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깁은 두번 다 대회 참가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깁이 공식격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것은 여성의 마라톤 대회 참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지만 여성이 그런 장거리를 뛰면 자궁이 떨어지고 가슴에 털이 자라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달에 탐사선을 보내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런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마라톤 대회는 여성의 등록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로버타 깁은 번호표(배번)를 받지 않은 채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뛰어나와서 마라톤을 완주했고, 그래서 기록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 스위처는 어떻게 공식 참가할 수 있었을까?

 

달리기를 좋아해서 한겨울에도 눈보라 속에서 10킬로미터를 달리는 운동광이었던 스위처는 재학 중인 시러큐스 대학교 달리기 코치에게 보스턴 마라톤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 코치는 대학교에서 우편배달부로 일하면서 짬을 내어 학생들에게 장거리 달리기를 훈련시키던 50세의 남성 아니 브릭스(Arnie Briggs)였다. 평소 스위처의 장거리 달리기 실력을 인정하던 브릭스였지만 보스턴 마라톤에서 뛰겠다는 스위처의 생각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여자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뛸 수 없어." 브릭스는 이미 보스턴 마라톤만 열다섯 번 참가했던 베테랑 마라토너였고 그 대회가 어떤 대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위처는 로버타 깁이 지난 대회에서 완주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브릭스 코치를 설득했다. 결국 브릭스는 "그렇다면 뛸 수 있음을 증명하라"고 했다. 스위처는 대회 3주 전에 처음으로 코치와 함께 42.195킬로미터를 완주했다. 하지만 풀코스를 뛴 후에도 힘이 남았던 스위처는 더 뛰자고 했고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던 브릭스 코치는 스위처와 함께 뛰다가 50킬로미터 지점에서 쓰러졌다. 그렇게 스위처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브릭스는 스위처가 보스턴에서 뛰는 것에 동의했지만 로버타 깁처럼 번호표 없이 비공식적으로 뛰는 것에는 반대했다. 대회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아마추어 체육연맹의 제재를 받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대회는 여성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었을까?

 

당시 보스턴 마라톤 규정집에는 젠더(성별)와 관련한 내용이 없었다. 즉 여성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성문화된 규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굳이 성문화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게 생각되던 '사회적 상식'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스위처는 캐서린 버지니아 스위처 (Kathrine Virginia Switzer)라는 이름에서 성별을 드러내는 부분을 약자로 바꾼 K. V. 스위처라는 이름으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등록했다. 여성임이 드러났으면 대회 측에서 등록을 거부했겠지만 등록을 하고 완주를 한다면 기록을 지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차별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바람에 제도에 구멍이 생겼고 이렇게 견고한 사회적 편견이 스위처에게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반대했던 브릭스 코치가 스위처의 변칙 참가를 돕는 공모자가 되었다.

 

스위처는 이 '거사'를 계획하면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로 알렸다고 한다. 딸이 어떤 아이인지 잘 알았던 그의 아버지는 "넌 할 수 있어. 너는 강인하고 훈련도 열심히 했으니까. 잘할 거다"라고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코치와 아버지 외에도 스위처를 응원하고 도운 남성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스위처의 남자 친구 톰밀러(Tom Miller)다. 밀러는 미식축구 선수였다가 해머던지기 선수로 전향한 스포츠맨으로 체중 106킬로그램의 거구였다. 그는 여자 친구 스위처 옆에서 함께 뛰겠다고 나섰다. 한 번도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없었지만 "여자가 뛰는데 내가 왜 못 뛰겠냐"며 등록한 것이다. 스위처가 여성인 것이 들통 날까 걱정했던 밀러는 출발 전에 스위처가 립스틱을 바른 것을 보고는 어서 지우라고 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제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처는 절대 지우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위처가 6킬로미터 구간을 통과할 때쯤 사람들은 여자가 마라톤을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고 한다. "어라, 여자가 뛰고있네?" 하고 놀란 관중과 기자들은 스위처에게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그 소식은 곧 마라톤 조직위원회에 전해졌고 조직위원장이자 감독관인 조크 셈플(Jock Semple)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타고 선수들을 따르던 그는 차에서 내려 스위처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번호표 내놓고 경기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면서 스위치의 번호표를 뜯으려는 듯 그의 웃옷을 움켜쥐었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남자 친구 밀러가 몸을 날려 셈플을 밀쳐냈다. 스위치는 밀러와 브릭스 코치의 호위를 받으며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스위처 앞을 달리던 기자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영상으로도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7년 캐서린 스위처는 70세의 나이에 다시 보스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50년 전에 세운 자신의 업적을 기념했다. 결승선에서 많은 사람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세상이 50년 만에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친애하는 슐츠씨> 박상현, 어크로스, 2024, 24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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