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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네 가지 스트레스로 탄생한 숭미 유전자
너무 멀리 갈 것까지는 없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시절이다. 36년 동안 한국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어딜 봐도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절대 다수의 조선인들이 포기하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에 부역하고 배불리 먹는 일만 생각했다.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조국의 해방을 예상한 사람 역시 극소수였다. 그러다가 느닷없는 광복을 맞이한다. 해방은 됐지만 환호성을 올리기도 민망했다. 내가 독립을 위해 한 일이 없는데 자랑스럽게 만세를 부를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어색하고 민망한데다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당하게 싸울걸! 첫 번째 스트레스였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이제 해방은 되었는데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건준은 흐지부지되었고 사회는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 더군다나 나라는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가 물러가고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은 없었다. 두 번째 스트레스다.
우리를 식민화했던 일제에 대한 보복이나 응징도 없었다. 우리 힘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니 그럴 실력도 안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악질 친일부역자들 청산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족적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이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에 잡혀 따귀를 맞지 않나, 반민특위라고 출범은 했지만 1년 만에 이승만이 와해시키질 않나 도무지 나라가 꼴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울화와 분노와 체념과 오기와 자학과 질투심이 복합적으로 들어앉았다. 세 번째 스트레스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네 번째 스트레스가 곧 닥쳐왔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유전자가 변이의 과정을 거쳤다. 좌절의 스트레스는 활성산소를 다량으로 발생시켰고, 활성산소는 세포를 공격하고 유전자를 돌연변이시켜 강인한 생명체로 거듭나게 했다. 일종의 암 덩어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암세포는 어떠한 악조건 하에서도 살아남는 능력을 획득한 슈퍼 생명체다. 우리 몸이 전체적으로 암세포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한마디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창조된 새로운 진은 우리로 하여금 외부의 좌절적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슈퍼 유전자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진이다. 첫 번째 자학의 스트레스와 두 번째 실망감의 스트레스와 세 번째 울분의 스트레스와 네 번째 생사갈림길의 스트레스가 합쳐졌으니 짧은 기간 안에 한국인이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는 태양계 생성 이후 가장 극심한 정도였을 것이다. 암 유전자 아니면 견뎌내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 연속되지 않았는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스트레스는 이에 비하면 오히려 양반이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새롭게 창발한 진은 특별한 표현형을 발현시켰다. 그것은 일제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은 미국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인식하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지난 36년 간 조선을 마음대로 농락했던 강자 일본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강력 무기로 한 순간에 무릎 꿇게 했다는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요는 미국을 동경하는 진과 밈이 생겨났으며 그것은 매우 안정적인 자기 복제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존 하지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이 군정을 펼치면서 해방 전부터 조선반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좌익들의 발호가 점차 정리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소한 지주와 자본가 계급들에게 미국은 믿을 만한 국가라는 신뢰감 역시 형성되었다. 비록 건준이 출범하자마자 와해되었지만 미군정청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도 형성되었다. 게다가 비록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민족적 열망과는 거리가 멀었고 반민특위도 얼마 못가 해체되는 상황을 모두가 목도했지만, 이것 역시 미국이 등을 밀어주는 나라라면 얼마든 희망적인 미래를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염원으로 상쇄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해방 직후에 남한에서는 과거의 암울한 좌절의 시간을 미국이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유전자가 생성되어 퍼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스트레스로 생기는 암세포처럼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는 슈퍼 유전자였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슈퍼 진은 다른 평범한 진을 파괴하고 자기를 최대한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초강력 이기적 유전자가 탄생한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의 뇌 속에는 세계 최강국 미국이 우리를 구원하러 이토록 멀리까지 애써 왕림했다는 감사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군들의 훤한 얼굴과 훤칠한 키와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미국의 문물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아울러 각인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바로 신이라는 생각도 주인을 바꾸어가며 점점 더 강력해져 갔다. 반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자학이 미국에 대한 선망과 결합되었다. 한마디로 숭미의 밈이 탄생했고 빠르게 복제되면서 진화해 나갔다는 얘기다. 이러한 숭미의 진과 밈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참전으로 무한대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들의 젊은 아들 딸들을 이곳에 보내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결코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감동은 강하든 약하든 숭미 유전자와 밈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을 하늘이 보낸 천사와 다름이 없는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이제 숭미의 진과 밈은 수억 배 강력한 복제자로 재차 변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기력과 가치상실이라는 해방 직후의 진과 밈은 이제 생명력으로 충만한 숭미의 진과 밈으로 갈아 끼워졌고 이는 한미 동맹조약의 출범과 함께 최대로 고조되었다. 나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미국은 이제 신 중에서도 최상의 신이요, 한미동맹은 한국의 헌법 위에 위치하는 초월자가 된 셈이다. 숭미의 진과 밈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철천지원수로 인식하게끔 우리의 가슴과 두뇌를 조종했다. 또 그것은 미국이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미국을 섬겨야 한다는 식의 정언명령을 우리의 피와 두뇌에 심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떠받드는 삶의 원칙이 정언명령 아닌가. 물론 모든 이들에게 숭미의 진과 밈이 동등하게 박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미국이라면 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또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숭미의 진과 밈이 견고하고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숭미의 진은 예컨대 자주의 진이라든지 통일의 진과 같은 다른 진들을 모조리 누르고 지배적인 진으로 대다수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진들을 철저히 이용해 자기의 복제를 증폭시켜 나갔다. 숭미의 진은 태양계에서 가장 냉혈적인 이기적 유전자로 진화를 계속했다.
<브라보 한미동맹> 이창천, 진인진, 2025, 26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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