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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by 길찾기91 202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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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백성들까지 굶주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때에 상당한 규모의 공사가 벌어졌다. 창덕궁 동쪽의 성균관에 인접한 숭동에 새로운 관왕묘가 건설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북관왕묘, 또는 북관묘로 불렀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관우는 중국 곳곳에 사당이 있으며, 조선에서도 도성의 중심지에 동묘를 세워 극진하게 추모하던 터였다.

새로운 관왕묘의 주인은 무당이었다. 민자영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온 무당은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무당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적지 않은 다른 무당들과의 차별성을 가지지 위함이었다. 관우를 몸주로 섬기는 것은 어지간히 영험한 무당들도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왕비의 총애를 받는 무당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민자영이 환궁하는 것은 물론 시기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무당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격에 맞았다.

고종과 민자영은 그에게 '진령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진실로 영험하다'는 의미인 진령의 다음에 븥은 '군'의 칭호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의 아들이거나 왕실과 지근거리에 있는 종친, 또는 왕의 부인이어야 비로소 군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드물게는 이하응처럼 왕의 부친이어야 군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신료의 경우 역사에 이름을 남길 공을 세우거나, 영의정을 역임하는 것은 물론 당파를 이끄는 영수로 활약하면서 군주의 신임까지 돈독해야 비로소 군호를 받을 수 있었다. 군호라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지닌 칭호였다.

그런데 무당은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광대와 더불어 천민의 신분인 무당이, 그것도 여성으로서 군호를 받은 인물은 민자영이 총애했던 무당이 조선 역사상 유일하다. 유림을 대표하는 율곡 이이를 낳고 교육해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공인된 신인선도 당호를 받아 신사임당으로 불렸을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파격에 파격을 더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조차 희미한 무당을 진령군에 봉한 고종과 민자영은 북관왕묘를 건립해 주인으로 앉히기까지 했다. 국가살림이 거덜 난 상태에서 동묘와 대등한 규모의 공사를 시행하려면 의미 그대로 혈세를 쥐어짰을 터였다. 강제로 끌려온 백성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을 것 역시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럼에도 조정과 궁궐에 앉은 자들은 관우의 혼을 모신다는 무당 한 명의 편의를 위해 그 모두를 외면했다. 국가를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홀린 것을 보다 못한 나머지 재정을 담당하는 공조참판 이응진이 상소했다.

신이 보니 동리 안에 아주 잘 지은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았습니다. 듣건데 신사로서 백성들이 문미에 이따금 '복마성제 伏魔聖帝'라는 글을 써서 걸어놓는다고 하니, 이것은 모두 이전에 보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관우를 숭상하고 받들어서 이미 동관왕묘와 남관왕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북관왕묘를 새로 세워 의식제도도 존엄하니 도성의 남녀들이 푸닥거리할 곳이 없다고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만약에 무당을 위해서 집을 짓고 어지럽힌다면 매우 불경한 일일 것입니다.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괴이한 귀신과 각종 귀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당의 신령들은 법에 어긋나 조정의 명령으로 금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상서>에 이르기를, '착한 일을 하면 상서를 내려준다' 하였고, '은혜는 길한 데로 나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선량한 군자는 복을 구하는 데에서 간사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치상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무지하여 오직 귀신을 섬겨 요구하고 있으나, 불쌍하고 딱한 일입니다. 속히 법사로 하여근 있는대로 헐어버려서 수도를 엄숙하고 맑게 한다면 또한 바른 것을 보위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응진이 진중하게 올린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무당이 고주할 장소를 마련해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격이 없는 자가 대궐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권력을 농단하고 귀중한 혈세가 복채가 되어 사라지는 망국의 역사가 바야흐로 열렸다.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배상렬, 청림출판, 2017. 10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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