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백신(예방접종)은 항생제와 함께 현대의학의 가장 눈부신 성과다. 소아마비, 홍역, 볼거리, 풍진, 백일해, 파상풍, 디프테리아, 일본 뇌염, 황열병, 장티푸스, 콜레라, 인플루엔자 같은 질병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공포의 대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장애로 고통받았다. 그러나 백신이 나오고 나서 상당수의 질병이 자취를 감추었고 나머지도 그 위세가 한풀 꺾였다.
그런데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백신을 접종해도 모든 사람에게 면역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10명에게 접종해서 10명 모두 항체가 만들어지는 백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10명에게 접종했을 때 8~9명에게 항체가 만들어져서 면역이 생기는 정도라면 대단히 우수한 백신이다. 실제로 10명에게 접종해서 4~5명만 면역이 생기는 백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예방접종이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이른바 '집단면역Herd immunity'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예방접종을 시행하는 질병은 대부분 전염병이다. 또 감기와 말라리아처럼 같은 사람이 반복적으로 감염되는 질환이 아니라 한 번 앓고 나서 회복한 사람은 다시는 걸리지 않는다. 그런 전염병이 유행하려면 많은 수의 '면역 없는 사람'이 필요하다. 특정 집단에서 '면역 있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지면 전염병은 유행하기 어렵다. 운 좋게 한두 사람이 걸려도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면역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서 유행을 오래 이어갈 '연결고리'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방접종이 없던 시절에도 전염병은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면 많은 사망자가 생기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면역을 획득했으니 그 집단에서 면역 있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진다. 그러면 전염병이 감염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해서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시간이 흘러 면역 있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사망하고 전염병의 유행 이후에 태어난 '면역 없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감염의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게 되어 다시 전염병이 유행하게 된다.
집단면역은 이렇게 특정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가 지니는 면역으로, 실질적으로 전염병의 유행을 좌우한다. 예방접종이 없던 시절에도 한 차례 전염병 유행이 끝나면 일정 기간 동안은 집단면역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예방접종은 '전염병의 유행 없이'도 그런 집단면역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다만 집단 전체에 시행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만약 특정 집단에서 예방접종을 고의로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지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무리 엄격하게 예방접종을 해도 전염병의 유행은 피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영국에서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 웨이크필드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백신 반대론자들과 합류한 것은 심각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침 튀기는 인문학, 곽경훈, 아현, 2020. 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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