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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프레이저 보고서에 나타난 박정희 정권의 실태

by 길찾기91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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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보고서에 나타난 박정희 정권의 실태

 

미 의회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위원장 도널드 M. 프레이저)1978년 장문의 <프레이저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회와 행정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박동선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 중앙정보부 박정희 대통령 · 경제단체 · 통일교단 등을 중심으로 상세히 조사했다. 먼저, '보고서' 내용 중 유신체제에서 벌어진 박정희의 폭압적 권력행사의 사례를 살펴보자.

 

수많은 학생·지식인 · 종교 지도자(지학순 주교를 포함하여)가 체포되어, 유신체제 비판이 박의 1974년 긴급조치를 위반했다고 하여 징역을 언도받았다.

 

1974년 박 정권을, 장기집권을 위하여 남북대화를 조작한 억압적 독재자로서 비판하는 선언문을 채택한 민주청년학생연합과의 어떠한 접촉을 금지한 긴급조치 중 하나에 의해 14명의 인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1974년 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보도해오던 동아일보가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의해 모든 광고를 박탈당했다. 당분간 신문은 발행부수 증가와 언론자유를 지지하는 많은 소규모 익명의 광고 게재인들을 통해서 대중에 의해 유지되었다. 캠페인은 19753월 경영진이 정부압력에 결국 굴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5년 초 석방된 시인 김지하는 정부를 비판하고 '인민혁명당은 정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동아일보에 실었다고 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김의 종신형이 재언도되었고, 유죄 판결로 그는 7년의 형을 더 선고받았다. 1978년까지도 그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1975년 형법 개정으로 해외에서 혹은 국내의 외국인에게 한국을 비방하거나 공공복지에 해를 끼치는 발언 또는 행동을 하는 한국 시민에게 7년 징역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되었다.

 

19755월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했다. 이는 긴급조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으로 1978년까지도 여전히 유효했다. 유언비어의 유포, 헌법의 비판, 학생의 정치활동, 법률에 위배되는 활동의 보도를 금하는 이 긴급조치하에서 실제로 항의 사건의 수가 격감되었다.

 

197618명의 저명한 정계·학계·종교계 지도자들이 김대중과 윤보선을 포함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민주주의의 평화적 회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고 하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대부분이 정치적 권익과 시민권의 박탈과 함께 석방되었지만 김대중은 197810월에도 여전히 수감되어 있었다.

 

19787월 박 대통령은 단독으로 출마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6년 임기에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김재규 장군 평전, 김삼웅, 두레, 2020. 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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