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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김삼웅의 김재규 장군 평전

by 길찾기91 2020.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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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자신의 어깨에 별을 스스로 두 개씩이나 더 얹었던 박정희는 마치 자신이 하늘의 별이요 태양인 양 행세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고 독재의 그늘이 엄습하면서 4·19로 잠시 밝음과 희망이 되살아났던 이 땅은 도로 더 짙은 어둠과 절망에 뒤덮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걸고 출범한 대한민국이었지만 어느새 민주民主와 공화共和는 그가 만든 정당 이름으로 전용되며 그 뜻을 잃어버렸다.
민주와 공화는 박정희와 군사독재의 국방색 장막 아래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왜곡된 채 제 뜻을 되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독재정권의 사생아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12년과 이명박·박근혜 집권 9년도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모두 합치면 39년, 일제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한민국은 박정희와 그의 후계 및 아류 세력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변곡점에 김재규가 있었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맞서 1979년에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잔혹한 방법으로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모여 투표하는 체육관선거(1978. 7. 6)를 통해 다섯 번째 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는 1979년 10월 4일에 제1야당 총재인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던 가운데 제1야당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당하자 부산 ·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서 이른바 부마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청와대경호실장 차지철은 이렇게 말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김재규의 10·26 거사가 아니었다면 차지철의 말대로 실제 그런 참상이 벌어졌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그동안 박정희의 행적이나 권력욕을 보거나, 차지철을 비롯해 전두환 등 박정희를 둘러싼 충성분자들의 행태를 보면 충분히 가능했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지만,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그리고 서울이나 광주 또는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5·18 광주학살의 참혹한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니리라.
역사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의사라 부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민주공화제를 짓밟은 독재자였던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역사의 정명을 찾지 못한 채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재규 장군 평전, 김삼웅, 두레, 2020.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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