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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진화적 기원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절체절명의 화두는 생존과 번식이다. 특히 생존을 유지해야 번식도 가능하기에 생명체들은 우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는데, 문명의 보호를 받지 못한 인간의 조상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는 위협한 대상을 재빠
르게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이 아닌 단순한 감정적 대응이 훨씬 유리하다. 위험한 것을 안전하다고 잘못 판단해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것을 위협한 것으로 판단하고 과잉 대응해 살아남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즉, 특히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는 잘못된 대응으로 곤란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일단 안전한 것이 최우선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생겨난 정서적 기제가 혐오라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뱀이나 쥐, 거미. 말벌, 바퀴벌레 등을 보면서 느끼는 강력한 기피의 감정 역시 여기서 비롯된 것인데, 의학적 도움이 없던 과거에는 이들이 독이나 병원균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들이 살던 시대에는 뱀과 비슷해 보이는 무언가가 발견되면 재빠르게 도망치게 만드는 유전자가, 가까이 다가가 탐색하고 확인하게 만드는 유전자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물론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관찰하고 분석하는 자세가 특정한 성취를 이루는 데 필요한 자질일 수도 있지만, 이 자질이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영향은 직접적이지 않았을뿐더러 그것이 자연선택으로 선택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이란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으로 유리한 유전학적 자질이 여러 세대에 걸쳐 점차적으로 다른 변이들을 제치고 퍼져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대인들 역시 자신의 생명에 별다른 지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커다란 벌레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거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다.
생명체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침이나 대소변과 같은 분비물이나 배설물 역시 본능적인 기피의 대상이다. 코로나19 확산 이후로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생성되는 호흡기 비말이 감염의 통로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지만, 누가 침을 뱉는 모습을 보거나 누군가가 먹다 남긴 음식을 보고 생기는 거부감은 이런 과학적 지식과 상관없이 발생한다. 대변에 대한 거부감은 특히나 강력하다. 한국 속담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똥은 음식이 소화되고 난 찌꺼기로서 그 자체로 딱히 더러울 이유는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를 침략한 독일군은 큰 문제 하나를 맞닥뜨렸는데, 바로 이질이었다.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라 마땅한 대응책도 없었다. 그러던 중 현지인들은 이질에 걸리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낙타의 똥을 먹는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는데, 독일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이를 조사해 보니 그 안에서 고초균이 발견되었다. 고초균에는 다른 세균을 억제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이질균도 마찬가지로 억제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똥도 실제 약으로 사용된다. 클로스트리디오이데스 디피실리 장염이란, 장기간 항생제를 복용하는 환자의 장내 정상 세균총이 망가짐에 따라 디피실리균이 증식하면서 생기는 증상이다. 설사와 복통, 메스꺼움을 동반하는 염증이 발생하고, 심할 경우 천공이 생기거나 패혈증이 생기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디피실리균은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어서 아직까지 치료제가 없는 데 반해, 대변 이식의 전체 성공률은 90퍼센트로 보고될 정도로 치료 효과가 크고 안전하다.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 생태계가 살아 있는 상태로 옮겨져 이식받은 사람의 장 건강도 개선하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 분야에서도 대변 이식이 시도되고 있다. 면역항암제는 다양한 암종에서 우수한 치료 효과를 보여 표준 치료법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많은 환자에게서 내성이 발생하는 한계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장내 미생물이 인체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을 활용하기도 한다. 즉, 면역항암제에 좋은 치료 효과를 보인 환자의 대변을 면역항암제 내성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병원의 통제하에 잘만 사용하면 약으로도 쓰일 수 있는 대변이지만, 야생 상태에 오래 방치되어 있으면 침이나 소변과 같은 다른 배설물에 비해 병원균이나 기생충이 번식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욱 강한 혐오 기작이 발달했을 것이다. 이런 기피 메커니즘이 병원균에 의한 오염에서 비롯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하는 데 유리했기에 자연선택되어 온 것이다. 한마디로 똥이 실제로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더럽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피성의 혐오가 사람을 대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치는 오늘날의 익명 사회와 달리, 인류 역사의 거의 대부분 동안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소규모의 혈연, 지역집단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을 미지의 경계 대상으로 간주해야 했을 것이다. 알지 못하는 상대가 병을 옮길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안전 최우선의 진화적 전략, 즉 일단 병을 옮길 가능성을 전제하고 무조건 기피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세균, 전염병, 질병 등을 연상시키는 사진을 보고 나서 이민자나 이민정책에 대해 보다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실험 결과들은 타 인종에 대한 기피 현상이 질병을 피하기 위해 생긴 진화적 기제라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의 마크 살러Mark Schaller 교수는 이 이론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행동면역계'라는 개념을 도출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행동면역계는 병원균이 있을 수 있음을 알리는 지각 신호에 반응해 혐오와 같은 심리 반응 그리고 회피와 같은 행동 방식을 유도한다. 즉, 혐오는 감염 가능성이 있는 대상과 행위에 대한 회피 행동을 통해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하는 선제적인 대응 전략이다.
이렇게 보면 행동면역계 그 자체는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방어기제인 것 같지만,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안전 최우선의 전략으로서 혐오 기제가 사용될 때 그 상대에게 전가되는 비용이 때로는 너무나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근거 없이 과잉 발휘되는 과정에서 선량한 상대의 인격 내지는 생명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는 광범위한 감정으로서 오염이나 불결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고, 물건이나 동물이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취급한다. 즉, 사람을 향한 혐오와 물체나 동물에 대한 혐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이 일어날 때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뇌 영역이 마치 우리가 물건을 대하고 있다는 듯이 잠잠한 비활성화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이민제한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일 때 이민자들을 ‘먹으면 체하는 음식’, '박멸해야 하는 기생충', '말라리아를 실어 나르는 모기떼‘, '암세포' '폐기물 쓰레기'와 같이 지칭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유전자 지배 사회> 최정균, 동아시아, 2024, 5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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