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모으기 운동, 그 후
그것은 분명 위대한 행동이었다. 내 나라의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패물을 내다판 나라는 전 세계에서 전무하다. 우리는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정신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대한민국과 국민의 저력을 보여준 위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그 극적인 드라마에 너무 함몰된것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우선 그 패물을 사들인 것은 정부가 아니라 위탁받은 민간 기업이었고 국민들에게 싸게 사서 제값에 외국으로 내다 팔아 얻은 차액의 상당 부분을 그 기업들이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감동 드라마 덕택에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이 모두 그 드라마의 커튼 뒤로 숨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들이 제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장관이나 실무자, 기업의 회장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면피의 조건을 혹시 금 모으기 운동이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결국 금 모으기에 참여한 서민들만 그 고통과 책임을 떠안았다.
그렇다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당시 환율과 유가는 600원대 중후반을 넘나들었는데 갑자기 세 배 넘게 폭등했다.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도 월급은 동결되었으니 가계 상황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은 1/3로 폭락했으니 안팎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조용히 그렇게 추락한 부동산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나중에 위기를 넘긴 후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그 이익을 고스란히 누렸다. 게다가 IMF체제를 졸업하자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경험자라며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거나 혹은 화려하게 컴백해서 자리를 차지했다. IMF사태 이후 그들의 이익구조는 그렇게 완벽하게 강고해졌다. 반면 중산층은 붕괴되고 구조조정의 미명으로 해고된 이들의 삶은 추락했으며 이른바 아웃소싱의 여파로 온갖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의 뿌리는 이 시기에서 비롯된다.
IMF체제가 시작되면서 구조조정의 짐은 대부분 하부구조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위기 싱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회사가 살아야한다고 눈물을 머금고 떠났다. 다시 돌아갈 기약도 없이. 그렇게 엄청난 출혈을 겪으며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럼 그 다음은 상부구조에도 구조조정의 본격적 메스가 가해져야 했다. 그런데 딱 그 타이밍에 IMF체제를 졸업한 것이다. 그 핑계로 상부의 구조조정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총체적 구조조정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물론 상부의 출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부에서 겪은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이후 회복과 성장을 통해 기업은 오히려 IMF 이전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 그리고 그 성과는 모두 상부의 소수가 차지했다.
지금 대한민국이 소수의 부자와 절대다수의 빈자로 양분된 것은 이러한 프레임이 굳어지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제는 많은 경제학자들도 3년 만에 IMF체제를 졸업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차라리 5년쯤으로 연장되어 상부구조까지 개혁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지금 건국 이래 최고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에는 인색하고 고용은 꺼린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철저한 탐구나 이해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늘 그렇게 살아오면서 온갖 혜택 다 누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기업을 운영하는 데 이미 길들여진 까닭이다.
<고장난 저울> 김경집, 더숲, 20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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