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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고르지 않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 1959-2020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by 길찾기91 202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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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지 않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먹는 것, 입는 법, 사는 곳, 여가를 보내는 방식을 포함해 우리의 삶은 60여 년 사이에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풍요롭고 화려하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됐다. 2020년 말 인구는 5,183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연간 신생아 수는 지난 10여 년 동안 40만 명 안팎을 유지하다가 최근 급격히 감소해 2019년에는 30만 명을 겨우 넘겼다. 사망자 수는 201930만 명에 조금 못 미쳤지만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여서 2020년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인구가 자연 감소한 해가 될 전망이다.

 

19591인당 GDP81달러였지만 20191인당 국민총소득(GNI)32,115달러가 됐다. 대한민국 기업은 20186,049억 달러,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 등 악재가 터진 2019년에는 5,424억 달러의 재화와 서비스를 수출했다. 반도체·기계·자동차·석유화학·철강·디스플레이·선박·무선통신기기·섬유·컴퓨터·가전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같은 기간 수입은 각각 5,352억 달러와 5,032억 달러였는데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와 원자재가 절반이 넘었고 기계와 부품, 밀과 육류 등의 농축산물과 옷, , 승용차, 골프채 같은 기호품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여행과 관련한 해외 지출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일부 광물자원 이외에는 수출할 것이 아예 없었던 나라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대국으로 올라섰으니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202월 기준 경제활동 인구는 2,799만 명, 취업자는 2,684만 명이었다. 60년 동안 인구가 두 배로 늘고 고용율도 두 배가 되어 취업자 수는 네 배로 불어났다. 미성년자 비중이 줄고 여성 경제활동 인구가 증가한 데 따른 현상이다. 실업자는 115만 명, 실업률은 4.1%였지만 취업자 분류기준이 매우 느슨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 실업자는 더 많을 것이다.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은 4.5%, 광업과 제조업은 16.7%, 건설업은 7.3%에 지나지 않으며 70%가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서비스업을 뜯어보면 도소매와 음식, 숙박업이 21.8%였다. 사업서비스 개인서비스 공공서비스 등 종사자가 35%를 넘겼는데 여기에는 전기, 가스, 상하수도, 폐기물 처리, 원료재생, 환경복원사업과 부동산업 및 임대업,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사업시설관리 및 사업지원 서비스업,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교육 서비스업, 보건업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 예술·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 협회 및 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업, 국제 및 외국기관종사자 등이 모두 포함된다. 전기·운수·통신·금융업은 12% 정도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주거환경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초가집은 특별한 보호를 받는 구경거리가 됐고 절반 넘는 국민이 아파트에 살며 난방과 취사는 가스와 전기, 석유로 해결한다. 택지개발이나 골프장 건설, 공장과 창고 건축, 산불 외에는 숲을 해칠 일이 드물어지면서 전국의 산에 나무가 빽빽이 들어섰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으며 생활하수를 빗물과 분리해 처리하고 정화하는 시설이 전국에 깔렸다. 환경보호 관련법에 묶여서 개발할 수 없는 곳이 아니면 화장실은 다 수세식이다.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최저생계비를 지원하고 학교급식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비용을 낸다. 소아마비는 물론 콜레라나 말라리아 같은 악성 감염병과 기생충도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도시는 지하철과 버스 노선이 거미줄처럼 촘촘하며 아무리 먼 곳도 철도와 고속도로를 이용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스마트폰으로 날씨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사라보다 더 강력한 태풍이 불어도 사망·실종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나라 안팎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은 대통령이 보고를 받는 바로 그 시간에 평범한 시민도 알 수 있다.

 

배움의 기회를 완전히 놓친 일부 고령층을 제외하면 문맹자가 거의 없고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무제한 투자하는 문화로 인해 거대한 사교육 산업이 생겼으며 외국 유학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다. 딸이라는 이유로 교육시키지 않는 경우는 드물며, 존재를 감추고 살아야 했던 중증장애인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며 세상으로 나왔고, 성소수자도 부당한 차별과 공개적으로 싸우고 있다.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대한민국은 풍요롭지만 고르지 않은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산업화 시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1997IMF 경제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구조로 자리 잡았다.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중산층이 줄어들었으며,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워졌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았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해졌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이어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진 가운데 대자본의 중소협력업체 수탈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 대형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장악 현상이 횡행한다.

 

정치도 다른 분야 못지않게 달라졌다. 북한 편이라는 의심을 받을 만한 내용을 제외하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 술자리에서 대통령 험담을 하는 건 평범한 일상이다. 실명인증을 하고 접속한 포털 게시판에 현직 대통령을 쥐··재앙 · 공산당이라고 비하하는 댓글을 달아도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 정부나 국가정책을 세게 비판한 사람을 검찰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구속하고 기소하는 일도 드물어졌고, 수사기관이 그렇게 하는 경우에도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다. 국가의 힘이 여전히 강하지만 시민이 국가권력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문으로 증거를 조작해 죄를 덮어씌우는 독재 시대의 습성도 더는 용납되지 않는다. 수사기관이 증인을 회유 협박하거나 증거를 조작해 사건을 만들어내는 행태가 아직 남아 있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출범하면 그마저 사라질 것이다. 20세기의 신생국가 중에 대한민국처럼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거대한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다.

 

크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의 생각과 태도다. 1953년 맺은 정전협정은 그대로여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행위를 잠정 중단한 상태에 있다. 남북의 이념·군사적 대결 상황을 끝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남북 당국자들은 19727.4 남북공동성명, 1991남북기본합의서, 20006·15공동선언, 200710·4공동선언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에 합의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우리 정부는 남북협력사업을 중단했고 북한 정부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렸으며 기존의 모든 합의는 효력을 잃었다. 이명박 정부의 금강산과 개성관광 중단, 천안함 사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실험,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제 강화, 반북단체들의 북한체제 비난 전단 날리기……. 2017년 말까지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분위기가 생겼다. 남북정상과 북미정상이 여러 차례 만나고 합의문을 발표함으로써 전쟁의 공포는 가라앉았음에도 북한핵과 미사일의 폐기와 체제안전보장,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 등 한반도 평화 정착의 필수과제는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니지만 국민은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 그 정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이 내면에 쌓았던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 전후세대에 상속됐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한국전쟁에 대한 원한,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1·21사태와 1983년 아웅산 테러를 비롯해 정전협정 발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이 저질렀던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과 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1959-2020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돌베개, 2021. 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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