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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 박정희 -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by 길찾기91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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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 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한 역사 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好惡)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특성을 지니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기에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다. 박정희는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녀 5남 중 막내로 1917년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난 탓에 소년 박정희는 살가운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 중도 진보 성향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둘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 ·1 사건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목숨을 잃었다.

소년 박정희는 공부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었으며 책을 많이 읽었고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 과목과 체육 성적은 뛰어났다. 집안의 강권으로 김호남과 혼인했지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않았던 그는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중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일본 괴뢰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고 1940년 제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다음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꿨는데,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 창씨개명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 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됐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과 싸웠다.

일본의 패전과 만주군 해산으로 소속이 없어지자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이 됐으며, 1946년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해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박정희 소령은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혼자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구해준 덕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괜히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우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에 복귀했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혼인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가 현역으로 복귀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쿠데타와 장기독재 끝에 부하의 총에 살해당하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좌익 전력’ 때문에 진급과 보직에 불이익을 받았던 그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세 차례나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는 1960년 3·15선거를 전후한 시기, 그 다음은 1961년 4월 19일이었다. 4·19 1주년을 맞아 민주당 정부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반정부시위를 벌여 혼란이 벌어지면 그것을 빌미 삼아 쿠데타를 하려 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날 이렇다 할 시위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거사일을 조정하던 끝에 5월 16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1959-2020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돌베개, 2021. 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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