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이야기

박정희의 맨 얼굴, 경제신화 화장을 지우다

by 길찾기91 2020. 11. 3.
728x90
반응형

너무 일방적으로 내용도 모르면서 지지하는 분들이 계신다.

난 같은 고향 사람인 주위 어르신들의 반응을 오래동안 보아왔다.

잘 한 일이 왜 없겠냐마는 그것보다는 아예 평가를 할 생각을 안하려는게 문제가 아닐까.

누구를 비난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다만 역사적 평가는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또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인 학자들이 차분히 정리한 글을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좋아하건 아니건 평가는 차분할 필요가 있다.

 

책 소개 일부.

모두 경제학을 전공한 쟁쟁한 국내학자 8인이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에 나섰다. 그들은 소총을 분해하듯 박정희 신화의 부품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의 야심에 찬 작업을 모은 책이 바로 <박정희의 맨얼굴>이다.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200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에 즈음해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이사장 함세웅)가 지원해 한국경제정책연구회에서 과제를 수행했다. 1차 연구 결과는 2009년 11월9일 열린 ‘박정희 시대 바른 평가를 위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됐으며, 그 뒤 계속 보강 연구를 진행하고 두 명의 학자 원고를 더 보태 이번에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발간사에서 “이 책이 친일 매국과 독재 체제가 형성한 온갖 부정과 불법을 송두리째 타파하는 변혁의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전태일 열사와 같은 노동자의 희생 없이 어찌 고도성장이 가능했겠느냐”라며 박정희 혼자서 그 공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  아래는 책에서

 

지가가 압도적으로 폭등한 시대는 박정희 시대다. 박정희의 집권기인 1963-79년의 16년을 보면 전국의 지가총액이 3.4조에서 329조로 폭등함으로써 무려 100배의 상승을 보였다. 이는 연평균 33%의 상승률에 해당한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한국의 지가총액은 1만배 넘게 폭등했다. 그 결과가 우리나라의 지가가 세계최고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이와같은 엄청난 지가 앙등에 대해서 어느 정권에서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가릴 필요가 있다. 지가 1만배 상승을 각 정권별로 분석해 보니 전체 상승 중 절반 이상(50.5%)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다. 다른 모든 대통령을 다 합해도 박정희 1인의 책임보다는 적다. - <박정희의 맨얼굴> '개발독재가 키운 두 괴물, 물가와 지가' 이정우. 87. 시사인북.

 

박정희 정권은 배(생산소득)보다 배꼽(불로소득)이 2배반(248.8%)아나 될 정도로 거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박정희식 개발은 '거품경제의 온상'이라고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가 앞장서서 강남개발 등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을 많이 썼고 그것을 통해서 고도성장을 달성한 면이 부각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현저한 부익부빈익빈의 진행, 서민의 고통, 졸부의 탄생, 노동의욕의 저해, 부의 사회적 정당성 상실, 사회기강 와해 등 심대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 <박정희의 맨얼굴> '개발독재가 키운 두 괴물, 물가와 지가' 이정우. 88. 시사인북.

 

민주주의, 인권, 역사적 정통성, 남북관계 등에서 역사를 크게 후퇴시킨 박정희 정권이 그래도 내세울 게 있다면 경제 하나뿐인데, 그 경제라는 것도 전국의 땅을 파헤치는 과욕에 의한 거품경제가 그 본질이었다면, 그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다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 <박정희의 맨얼굴> '개발독재가 키운 두 괴물, 물가와 지가' 이정우. 89. 시사인북.

 

존 자이스만이 분류한 바와 같이 대만 일본 한국은 은행대출을 기반으로 한 기본적으로 같은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박정릐 정권은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국가가 제시한 발전 방향에 따라 대규모의 사업을 추진하게 했고, 이를 통해 증가된 물질적 이익의 대부분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부의 편중화를 심화시켰다. - <박정희의 맨얼굴>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박현주. 113. 시사인북.

 

 

한국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정부는 종종 극단적이고 작위적이었다. 예컨대, 1961년 한국 정부는 1957년에 사유화된 민간은행을 국유화했다가 1980년대 다시 사유화했다. 1972년에는 모든 사채를 사실상 탕감해줌으로써 가장 채무가 많은 재벌들에게 가장 큰 수혜를 안겨주기도 했다.  - <박정희의 맨얼굴>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박현주. 125. 시사인북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의 대리인으로 소수의 재벌을 선정해 지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다수의 중소기업가들보다 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자로 아마도 대만과 같이 국유기업을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미국에게 본인이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을 쓸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재벌을 선택했다. 둘째, 소수의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다수의 중소기업을 통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 <박정희의 맨얼굴>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박현주. 126-127. 시사인북

 

한국의 성장속도에 대한 집착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통치 초기에 내렸던 의사결정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자본 및 기타 자원을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박정희의 맨얼굴>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박현주. 132-133. 시사인북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중심의 불균형적 산업화를 택했던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인 생존을 위해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사회와 경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신고전파 시장 모델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국유기업 중심 국가주의 모델 역시 미국의 반감을 고려하여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박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은 1930년대 일본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박대통령의 의도대로 빠른 성장을 가져다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로 특징 지을 수 있는 박정희 정부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분배의 불평등, 사회통합 저해 등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정희의 맨얼굴>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박현주. 136-137. 시사인북

 

압축 비약의 경제성장은 동시에 그 구조적 모순의 누적 과정이기도 했다. 즉 박정희 체제의 경제적 성공은 그 이후의 실패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박정희 체제는 지속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둘째, 박정희 체제는 안정적 체제전환의 가능성마저 결여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맨얼굴> '외환위기의 뿌리' 김상조. 144. 시사인북

 

19세기말의 후발자본주의국,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경우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한 정부는 주로 은행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와 일본 정부의 경제개입을 뒷받침하는 요소 중 하나는 정부가 산업자본의 상당 부분을 직접 조성했다는 데 있다. 반면 박정희 정권은 민간 자본 축적자금의 대부분을 외자도입 및 민간자금의 동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가 민간기업의 자금조달 및 운용을 직접적으로 개입 통제함으로써 이른바 관치금융 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의 맨얼굴> '외환위기의 뿌리' 김상조. 146. 시사인북

 

한국 제조기업의 외부자금 의존도가 1980년대 들어 하락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 1970년대의 40% 수준에서 1980년대 말에는 30% 수준까지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대대적 설비투자 확대가 주로 외부 차입자금에 의존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한 재무적 취약성은 해당 기업은 물론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박정희의 맨얼굴> '외환위기의 뿌리' 김상조. 156. 시사인북

 

박정희 시대에 구축된 개발금융체계는 특정 산업 특정 기업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통해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재벌이 생겨나고 성장했지만, 설비투자 자금의 대부분을 외부차입에 의존하고 투자의 목적 역시 외형 확장에 치중함으로써 금융산업과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맨얼굴> '외환위기의 뿌리' 김상조. 160-161. 시사인북

 

재벌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의 무리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따른 후유증으로 인해 정부의 지원을 계속 필요로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자본축적 활동에 제약이 되는 정부개입의 폐지를 동시에 요구하는 모순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3저호황을 통해 독점적 지배력을 크게 강화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에 반발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결국 경제운용 매커니즘의 전환을 둘러싼 지배블럭 내부의 균열이 한층 심화되었다. 그 결과 관치금융 등 과거의 잔재는 해소되지 않은 채 시장질서의 정상화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악순환이 초래되었다. 이것이 1980년대 '대내적 자유화'의 실패를 낳았고, 이로인한 축적위기릉 개방 전략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1990년대 김영삼 정권의 '대외적 자유화'는 결국 1997년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박정희의 맨얼굴> '외환위기의 뿌리' 김상조. 169. 시사인북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