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전쟁의 아이들
마리아는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에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 오스발도 히바스 부부에게 징역 25년형을 언도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에 나선 검찰은 오스발도 부부를 아동 납치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연은 마리아가 태어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78년 2월 군부독재 정권의 비밀 고문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나르도 삼파요와 어머니 미르타 바라한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며 싸우다 체포됐다. 고문실로 끌려올 당시 바라한은 임신 6개월이었다. 바라한은 고문실에서 출산했고, 고문실 장교에게 곧바로 아기를 빼앗겼다. 어미 손에서 떼진 아기는 오스발도 부부에게 건네졌다.
마리아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2001년이었다. 독재 정권에 의해 부모와 떨어져 자란 아이들의 가계를 확인하는 당국의 진상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도 그런 아기들 중 한 명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부모가 누구인지 확인했으나 부모는 이미 30년 전에 실종 처리된 상태였다. 마리아는 친부모를 따라 자신의 성姓을 '삼파요 바라한'으로 바꾸고, 고문실 장교 엔리케 베르티에와 양부모를 처벌하려는 싸움을 시작했다.
오스발도 부부가 어떤 인물들이고 어떤 경위로 마리아를 맡게 됐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치범 부부에게서 납치한 아기인 줄 알고서도 이 사실을 숨긴 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인디펜던트> 보도에 따르면, 마리아의 양부모와 전직 장교 베르티에는 결국 유죄판결과 함께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호르헬리나 몰리나 플라나스의 사연도 비슷하다. 호르헬리나는 '카롤리나 마리아 살라'라는 이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역시 '더러운 전쟁의 아이들' 이었다. 건축학도였던 아버지 호세 마리아 몰리나는 딸이 태어나고 1년 뒤인 1974년 8월 '카필라 델 로사리오 학살'이라 불리는 군부의 학살 때 친동생을 비롯한 다른 15명과 함께 사살됐다. 호르헬리나의 출생증명서에 아버지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좌파 게릴라 인민혁명군ERP 조직의 멤버였던 아버지의 이름을 적었다가는 아이가 피해를 볼지 모른다고 생각한 어머니 크리스티나 플라나스가 아버지 이름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마저 1977년 '실종자'가 됐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극적이었다. 호르헬리나의 친할머니인 아나 몰리나는 군부에 두 아들을 잃은 뒤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났다. 3년 뒤 며느리마저 실종된 사실을 안 아나 몰리나는 여생을 바쳐 손녀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국제 앰네스티를 포함한 여러 인권 단체에 아들과 며느리의 사진을 보내고, 스웨덴 정부에도 청원했다. 1980년 호르헬리나의 양부모가 살던 곳의 교구민 한 명이 그 사진들 중 한 장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이 이웃은 아나 몰리나에게 연락했다. 아나 몰리나는 호르헬리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호르헬리나는 부모의 진실을 알게 됐다. 그는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신원이 드러난 아이들 중 하나였다. 1984년에 당국의 조사로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확인됐다. 하지만 그때 호르헬리나는 겨우 열 살이었고, 양부모를 떠나 자신의 진짜 신원을 되찾은 건 2010년이 되어서였다.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양부모에게는 나를 합법적으로 입양했다는 서류가 있었다. 딸이 실종되자 두려움에 떨던 외할머니가 입양 서류에 서명했던 것이다. 내 출생증명서에 친아버지 이름은 없었고, 당시엔 유전자 검사 같은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친할머니에겐 내가 손녀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사연을 다룬 영국 <가디언> 기사를 보면, '다행히' 그의 양부모는 부모의 원수 격인 군부 관련 인사는 아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양부모는 교회 주선으로 입양했다. 군부가 빼앗은 아이들 중 상당수는 교회를 통해 '건실한 가톨릭 가정'들에 건네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의 눈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인종 개량' 망상이 널리 퍼진 1940년대 유럽을 생각하면 실마리가 잡힌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 진영'이 승리한 뒤, 마드리드 대학교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 소령은 1938년 여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정신질환자로 규정하고 14개 클리닉을 둔 심리학 연구 센터를 열었다. 우익 군부독재 정권은 볼셰비즘을 '정신적 오염’으로 취급하려 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스페인 민족의 오염을 막을 길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 적당한 기관에 맡겨 국민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3년에 1만 2043명의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운영하는 사회구호소와 고아원, 종교 시설로 보냈다. <스페인 내전>의 저자 앤터니 비버는 “이 방식이 30년 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체제에서 되풀이했다.'고 지적한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 후마니타스, 2018. 31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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