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진상규명 공식화와 그 과정 – 추미애의 깃발 중에서
결정적 증거를 찾다.
추미애 1999년도에 제가 제주 4·3에 대한 정부 공식기록문서인 '제주 4·3 수형인 명부'를 찾아냈습니다. 그걸 찾아내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었어요. 그전 해인 1998년에 이도영 박사가 가져온 서류뭉치를 보고 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것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이후 『제민일보』 쪽에서 탐사 내용을 기록한 책을 대여섯 권 가지고 왔어요. 김종민 기자를 통해 받은 『4·3을 말한다』를 함께 챙겨보면서 좀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귀포의 어떤 마을은 마을 전체가 제삿날이 거의 똑같아요.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이 영혼이라도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헛묘도 보았고요. 경찰이 기록한 정보보고서도 있었어요. 민간인 사찰문건인데, 어느 집에 피해자가 있고, 유족이 누구고, 어느 대학에 다니고, 가족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두 기록해놓은 것이었어요.
김민웅 깊이 들어가기 시작한 거군요.
추미애 네, 경찰의 기록을 당시 당국이 연좌제 자료로 썼던 거예요. 그러니 자세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그런 게 증거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이런 기록과 『제민일보』의 제주 4·3 관련 문건을 대조하고 연구하면서 일치된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 후로는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공식문건이 있는지 뒤지고 다녔어요. 그러다 수형인 명부를 찾아낸 거지요. 수형인 명부에는 재판절차 없이 형을 매기고,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던 교사·농부·학생 등 사상범이라고 추정할 수 없는 2,530명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 명부의 발굴로 제주 4·3의 진상을 공식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민웅 아, 수형인 명부를 발굴한 게 큰 의미가 있었네요.
추미애 네, 수형인 명부가 세상에 나온 이후 몇 가지 큰 역할을 했는데요. 첫째는 정부가 제주 4·3을 인정하고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공식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법적으로 재심 재판을 열 수 있는 근거가 되었지요. 이걸 근거로 22년이 지난 2021년 3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던 333명의 희생자에게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제주 4·3 발발로부터 73년 만에 희생되신 영령들을 자유롭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민간인학살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법적으로 명예를 회복시킨 첫 사례었으니 대단한 역사인 것입니다.
김민웅 들으면서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추미애 저도 그랬어요. 다들 반대하거나 반기지 않을 때 소신을 가지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한 거니까요.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지난 2020년 ‘72주년 제주 4·3 추념식’에서 “이 자리에 참석한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수형인명부가 제주 4·3 수형인들의 무죄를 밝혀주었습니다”라고 언급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초선의원 시절 제주 4·3의 문제를 제기했고, 20여 년이 지난 뒤 법무부장관이 되어 매듭지을 수 있어서 저 또한 제 정치 인생의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김민웅 사실 추미애와 제주 4·3의 관계를 젊은 분들은 잘 모르고 계세요. 그런 측면에서 2021년 3월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와 4·3 평화재단 등 관련 단체에서 ‘4·3 해결의 은인’ 감사패를 받은 것은 큰 의미가 있었겠네요.
추미애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제주 4·3의 비극은 대한민국 안에서 전 국민의 공유 대상이 아니었으니 당사자들의 통한이 얼마나 깊으셨겠어요. 저보다는 제주도민과 『제민일보』 등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진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제가 남아 있어요. 수형자 명부에 기록되지 못한 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우리 교육에서 제주 4·3을 제대로 알리고 가르치는 일이 남아 있지요.
김민웅 제주 4·3과 추미애는 그런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국가 차원에서 후속 작업을 계속 이어가야겠습니다. 제주 4·3은 그 이름조차 아직 없어서 그냥 제주 4·3인 상태입니다. 제주 4·3에 대한 해결방식은 어떤 특징을 가졌다고 자평할 수 있나요?
추미애 자평이라고 말하기는 죄송스럽고 신중해지네요. 제주4·3은 현대사의 비극을 가장 민주적으로 풀어낸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적 입법과 사법적 해결, 국가 차원의 배상과 보상을 이끌어낸 '역진불가'(逆進不可)의 예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사과와 사법부의 무죄 선고, 국가의 책임까지 연결하는 작업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경우라고 합니다.
제주 4·3이 남긴 것
김민웅 제주 4·3은 추미애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심어주었을까요?
추미애 앞서 제가 남편을 존경한다고 했는데 저도 책을 좋아하지만 남편은 독서광이에요. 심지어 아이들하고 휴가를 가는데도 책을 잔뜩 들고 가서 다 읽고 돌아옵니다. 제가 왜 여기까지 와서 책만 읽냐고 잔소리하면 “배운 사람의 의무”라고 하더라고요. 더 배우고 더 깨어 있어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정의를 향한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린 자세가 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제주 4·3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회생자의 명예를 복권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느꼈고 설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김민웅 제주 4·3을 정치현장에서 풀어가는 건 또 다른 차원인데 어떻게 밀고 나갔나요?
추미애 자꾸 남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제주 4·3 문제만큼은 남편과 상의를 많이 했어요. 남편은 사랑한다는 말은 자주 안하면서도 제가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하는 것을 계속 체크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죠. 1999년, 저도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꼭 제주 4·3의 한을 풀고 싶었어요. 그해 대정부질문에서 저에게 주어진 20분을 제주 4·3에만 전부 할애했어요. “인권유린의 20세기를 정리해야 한다”라고 군부 출신의 김종필 총리를 앞에 두고 말했어요. 그 바람에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았지요. “제주 4·3은 군경토벌대의 양민학살이었다. 현재 정부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 사과가 필요하다. 관련법 제정도 시급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종필 총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변했어요. 기대 이상으로 의미있는 답변을 받아낸 것이었지요. DJP 연합정권의 한계도 있었지만 그래서 가능했던 대목도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고조된 것 같아 법안 발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김민웅 국회에서의 그 영상, 저도 기억이 납니다. “양민을 상대로 한 초토화 작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라고 한 대목에서 울분을 참고 말을 이어나가던 모습이 선합니다. 집단몰살시키는 장면을 하나하나 짚어나갔지요. 법안 발의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추미애 아, 보셨군요. 제주도민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겠어요.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제도적 절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권이 후반을 넘어가면 동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때를 놓치지 말고 서두르자 했어요. 제주도민들은 20여 개의 조문(條文)을 들고 왔어요. 진상규명도 하고 명예회복도 하고, 재심도 하고 배상과 보상도 받아야 한다면서 이걸 한꺼번에 해결해주길 원하셨어요. 당연한 요구였지요. 제주도 분들이 이걸 한꺼번에 풀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법안 통과가 안 될 것 같다고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남편이 “정부가 진상규명을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머지는 진상규명 이후에 할 수밖에 없다”라고 해서 제가 무릎을 쳤지요. 맞다,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법으로 먼저 가야겠다고 결심한 거예요. 그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확실한 연결 다리가 될 테니까요. 그 대화에서 제가 힌트를 얻어 돌파할 수 있었어요.
김민웅 뭘 돌파한다는 거지요?
추미애 희생자 위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군경 유가족들의 처지는 다르잖아요. ‘정부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는 지점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대립구도만 부각되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기든요.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해주기를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부족했겠지만, 결국 이해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요구가 현실화되었고요.
김민웅 진상규명에 대한 절차법이 열쇠가 되었군요. 일단 진상을 규명하고 그다음 해결책을 모색해보자고 판단하신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상 자체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어 있었으니까요.
추미애 네, 맞아요. 그게 정말 ‘신의 한 수’였어요. 진상규명활동에 제약이 사라진 거니까요. 그런데 몇 년 뒤 그게 위헌입법이라고 극우세력에게 여러 차례 제소를 당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헌법재판소가 각하했지요. 이것은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절차법이지, 제주 4·3의 성격을 규정한 건 아니라는 것이 각하 결정의 근거였어요. 위헌 시비를 차단해버린 절차법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김민웅 돌아보면 '초선 추미애에게 가장 중요한 성취라고 느껴지는데요? 역사의식을 갖춘 정치인 추미애로 성장하면서 당대의 금기를 뚫고 나간 거니까요.
추미애 그렇습니다. 사실 광주 5·18에 대한 백서가 아직 없어요. 정부의 공적 권위로 광주 5·18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문회 백서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제주 4·3은 정부가 진상조사단을 만듦으로써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공인받게 했어요.
김민웅 이후 제주 4·3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 족쇄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정치가 당장의 현실적 요구 못지않게 역사와 만나 풀어야 할 바를 푸는 것도 너무나 중대한 책무라고 봅니다.
추미애 우리가 놓친 사실과 가치들을 하나씩 꺼내서 발굴해야 할 것들이 있었던 거지요.
김민웅 그러면서 제주 분들과도 새롭게 만나게 된 거지요?
추미애 네, 제주도 분들의 의식이 깨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제주도는 변방의 서러움을 겪기도 했지만 무역항로이기도 하고 군사기지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가까워 우리 근대사의 과정에서 지적 통로가 도리어 육지보다 앞섰어요.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곳이었지요. 요즘도 제주도에 갈 때마다 다른 내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광주 5·18과도 이어졌어요.
김민웅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관통되기 때문이지요.
추미애 광주 5·18 때는 제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느라 사건을 제대로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판사가 돼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이 금서로 지정되기 직전에 제 손에 들어왔어요. 그걸 밤새 읽고 마음이 아파 며칠을 앓았습니다. 그때 광주 분들께 너무나 미안했어요. 이런 엄청난 일을 내가 몇 년이 지나도록 까맣게 몰랐다는 것과 동시대에 살면서 난 무엇을 했나라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할 말이 없더라고요. 국회의원이 된 뒤 제주 4·3을 통해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게 되었고 거꾸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통해 제주 4·3을 되돌아보게 된 거지요. 그냥 묻고 지나가면 잘못된 역사가 반복될 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에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앞으로의 잘못을 예방하는 일이기도 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기본작업이기도 합니다.
김민웅 ‘추미애, 역사 앞에 서다’네요.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요. DJ 정치의 절정이었습니다. 평생 한반도 평화를 위해 사셨던 분이니까요. 제주 4·3도 사실 분단체제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장관님도 몇 년 후 낙선하고 미국에 가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나름의 국제정치적 견해를 정리하고 돌아온 것으로 압니다. 추미애 정치의 확장이자 진화의 과정을 통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추미애 맞습니다. 제주 4·3 진상규명은 DJ 정치철학의 표현이기도 했어요. 그랬기에 DI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인내하는 역사관을 배웠어요. 초지일관하면서도 때로는 격랑에 대처하는 지혜 말이지요.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는 깊이 있는 자세 말입니다.
<추미애의 깃발> 추미애, 한길사, 2021. 13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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