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
미국인들은 수세대에 걸쳐 그들의 국가가 신의 뜻을 따르는 선택받은 나라이며, 세상의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라는 믿음 한가운데에 미국 헌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거창한 비전이 조금 퇴색했다고 해도 헌법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다. 1999년 설문조사는 미국인 85퍼센트가 헌법이 “지난 세기 동안 미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핵심 기반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균형과 견제를 기반으로 삼는 미국의 헌법 체계는 지도자가 권력을 함부로 독식하거나 남용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고, 이러한 설계는 미국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기능했다. 남북전쟁이 벌어졌던 동안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주도로 이루어진 행정부 권력 집중은 이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연방대법원에 의해 원상 복구되었다. 그리고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불법 도청 사건은 의회 수사로 이어졌으며, 특검을 요구하는 양당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탄핵 국면으로 접어드는 가운데 결국 대통령의 사임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를 비롯한 다양한 사례에서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전제주의 위협을 막는 방파제로서 훌륭하게 작동했다.
그런데 헌법이라고 하는 보호 장치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지키기에 충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이라고 해도 때로는 실패한다. 가령 독일의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국가 최고 법률가들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의 유서 깊고 존중받는 ‘법치국가Rechtsstaat’라는 개념만으로도 지도자의 권력 남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과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권력 강탈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음으로 식민지 시대 이후의 남미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새롭게 독립한 여러 공화국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정치 모델로 삼았고, 미국 방식의 대통령제와 양당제, 대법원, 그리고 일부 경우에 있어서는 선거인단 및 연방제까지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일부 국가는 미국 헌법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남미 지역의 많은 독립국은 건국 초기에 내전과 독재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1853년 헌법은 미국 헌법과 대단히 흡사하다. 전체 조항의 3분의 2는 미국 헌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있었던 부정선거, 1930년과 1943년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 그리고 페론의 포퓰리즘 독재를 막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필리핀의 1935년 헌법 역시 ‘미국 헌법의 충실한 복사본’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필리핀 헌법 초안은 미국 식민지 당국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고, 미 의회가 승인한 필리핀 헌법은 권력분립과 권리장전, 그리고 대통령 중임제와 더불어 “자유민주주의의 교과서적 사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1972년 계엄령 선포 후 헌법을 철폐해버리고 말았다.
헌법의 힘이 충분히 강했더라면 페론과 마르코스, 그리고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와 같은 인물들(모두 명목상이나마 견제와 균형의 조항이 담긴 미국식 헌법 하에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은 악명 높은 독재자가 되는 게 아니라, 한두 번의 임기로 물러났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우선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다. 여러 다양한 규칙과 마찬가지로 헌법안에는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기술한 운영 지침도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때문에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설명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헌법 조항은 여러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하다. 가령 연방대법관 임명과 관련하여 상원의 ‘조언과 동의advice and consent’가 필요하다는 말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탄핵 기준을 충족하는 ‘범죄와 비행crimes and misdemeanors’은 정확하게 어떤 행동을 말하는가? 수세기 동안 미국인들은 이처럼 헌법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놓고 논의를 이어왔다. 헌법 조항이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다면 후손은 건국자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헌법을 악용할 위험이 있다.
마지막으로 헌법 조항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할 경우, 법의 취지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가령 최근 가장 혁신적인 형태의 파업은 '준법투쟁'이다. 여기서 근로자는 계약서나 업무지시에 규정된 대로만 움직인다. 즉, 성문화된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이럴 경우 생산 현장은 실질적으로 가동을 멈추게 된다.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잠재적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 미국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완전하게 작동하는 통치 체제를 개발할 수 있는 뛰어난 지혜를 그 어떤 정치인이나 철학자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말은 미국 정치 시스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미국 헌법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훌륭하다. 그러나 원래 네 쪽 분량의 헌법은 다양하게, 심지어 모순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FBI와 같은 독립적인 정부 기관을 자신의 측근 인사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담고 있지 않다. 헌법학자 아지즈 후크Aziz Huq와 톰 긴스버그Tom Ginsburg의 설명에 따르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심판을 매수하거나 정적을 탄압하기 위해 사법부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은 “얇은 관습의 막”이었다. 이처럼 헌법은 긴급조치나 행정명령을 통해서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그리고 국가 위기 시 확대 가능한 행정부 권력의 한계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후크와 긴스버그는 이런 경고를 내놨다. “[미국] 민주주의의 헌법적 보호 장치는 (…) 반민주적 지도자에 의해 쉽게 악용될 위험이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준 것이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한 헌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랬단 말인가? 아마도 미국 사회의 경제적 풍요, 탄탄한 중산층, 활발한 시민사회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두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을 꼽고 싶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비록 이러한 규범은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에서 규범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는 성문화된 규칙(헌법)과 심판(사법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기능하는 국가의 경우,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성문화된 헌법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완충적인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일상적인 정쟁이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아준다.
규범은 개인의 성향을 초월한 것이다. 규범은 정치 지도자 개인의 성향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 널리 공유된, 다시 말해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 규칙에서 비롯된다. 규범은 성문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규범이 제대로 작동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규범의 필요성을 종종 간과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규범의 가치는 물과 산소처럼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규범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 사람들은 폭력 행위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고, 혹은 공식적인 비판이나 노골적인 배척을 통해 부정하는 입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규범을 어긴 정치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어크로스, 2018. 127-132.
'책과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인해방신학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거라고 했지만> 제임스 콘 (0) | 2022.02.16 |
---|---|
101살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 - 끈기에 대하여 (0) | 2022.02.15 |
101살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 - 따뜻한 통찰 (0) | 2022.02.09 |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생물 절멸 작전 - 고장난 거대기업 (0) | 2022.01.20 |
[이책재밌다] 길바닥에 쓴 역사, 보도 명판 -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로먼 마스, 커트 롤스테트 (0) | 2021.10.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