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정의로운 사람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 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보헤미아 시골에서 태어나 프라하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을 때만 해도 얀 후스는 적당히 인생을 즐기는 남자였을 뿐이다. 교수보다 살기 편해 보여서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그 선택이 자신의 인생과 보헤미아 역사를 바꾸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는 프라하 시내의 베틀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는데 여러 면에서 남달랐다. 무엇보다도, 종교 의전에서 라틴어를 쓰라는 로마 교황청의 지침을 무시하고 체코 말로 설교했다. 신자들이 알아들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교 내용도 교황청을 화나게 했다. 그는 믿음의 근거를 교회가 아니라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난한 것이 특히 큰 문제를 일으켰다. 교황청은 후스를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교황청과 세속권력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던 보헤미아 민중은 그를 정신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보헤미아에 '후스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프라하의 교회를 지배하던 독일인 신학자들은 후스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후스는 바츨라프 4세 왕의 신뢰를 업고 독일인 신학자들을 밀어낸 다음 프라하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대주교와 교황의 설교 금지 명령과 출두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교황청이 자신을 파문하고 이단 혐의로 기소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요한네스 교황이 교황청 내부의 권력투쟁에 쓸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 대량 판매를 강행하자 프라하 시민들이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바츨라프 4세는 면죄부 판매 비판 금지 명령을 어긴 청년들을 참수했다.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 머물며 논문을 쓰다가 함정에 빠져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붙잡혔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종교 법정에 끌려나갔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415년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화형을 당했다.
후스의 영향력은 죽은 뒤에 더 커졌다. 보헤미아에 '후스파'라는 정치결사가 출현해 낡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1419년 7월 30일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급진 후스파 군중이 시청사에서 시장과 판사를 포함해 보헤미아왕의 신하 일곱 명을 창밖으로 던져 죽인 것이다. 천문시계를 보려고 온종일 관광객이 모여드는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라고 한다. 후스파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제출했다. “영성체 의식 때 일반 신도들이 신부와 같이 빵과 포도주를 먹게 하라. 설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정치 개입을 금지하라. 사제도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하라."
교황청은 이 요구를 '체제전복 시도'로 규정하고 여러 군주들이 파견한 군인들에게 십자군 깃발을 주어 프라하로 보냈다. 이른바 '후스전쟁'이 터진 것이다. 급진 후스파는 12년 동안 다섯 번이나 프라하 외곽에서 십자군을 격퇴했지만 온건파가 교황청과 손잡고 배신한 탓에 결국 패배했다. 그렇지만 온건 후스파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끈질긴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교회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고 보헤미아에 세속 귀족정을 정착시켰다.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가장 우세한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국민의 절반이 넘는 것은 세속정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얀 후스가 남긴 종교개혁 운동의 불씨는 결국 들불이 되어 유럽 중세 봉건 질서의 해체를 재촉했다. 후스가 떠난 지 백 년도 더 지난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후스와 똑같은 논리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공개 비판했다. 종교개혁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각지에서 농민봉기와 내전을 촉발하고 여러 갈래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를 만들어냈다. 위기에 봉착한 로마 교황청과 봉건 군주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개신교를 탄압하던 1618년, 프라하의 귀족들이 또 한 번 큰 사건을 일으켰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 셋을 프라하성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진 '제2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었다. 3층에서 떨어진 신하들은 죽지 않았지만 보헤미아의 반란은 군주들 사이의 영토쟁탈전으로 비화해 독일 · 덴마크.스웨덴·프랑스를 차례로 끌어들였다.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탓에 그저 '30년전쟁'이라고 하는 그 국제전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이 났고 유럽의 봉건체제는 막을 내렸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 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눈길 주는 이가 별로 없는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추었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틴 성당을 마주 보는 옛 시청사 앞은 카렐교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14세기 중반 제한적 권한을 가진 시의회가 탄생했을 때 지었던 시청사는 여러 차례 확장 공사를 거쳐 지금의 복합 양식 건물이 되었다. 후스전쟁의 진원지였던 시청사 자체는 르네상스 양식이지만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시계탑은 고딕 양식이다. 내부에는 예배당과 갤러리, 시계탑 올라가는 승강기가 있지만 여행자들은 대부분 밖에서 시계탑을 본다. 탑 전면에 있는 '천문시계' 때문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하누슈라는 사람이 15세기에 만들었다는 시계는 눈금판이 해와 달의 위치를 비롯한 천문 정보를 담고 있어서 '천문시계'라고 하는데 정기적으로 잠깐씩 움직인다. 해골이 줄을 당기고,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위쪽의 조그만 창문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미니어처가 지나가고, 닭이 울고, 다시 멈추기까지 1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고장 나 멈춰버린 시계를 전동장치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크게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없는 재미도 생기는 법, 천문시계 자체보다 그걸 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시계가 움직이기 전부터 슬금슬금 모여든 관광객들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서서 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를 제일 좋아한다는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한 손은 카메라, 다른 손은 가방을 꼭 움켜쥔채로.
유럽 도시 기행2, 유시민, 생각의길, 2022, 18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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