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이야기

인간의 잔인성 - 소금 눈물, 피에트로 바르톨로, 리디아 틸로타, 한뼘책방, 2020

by 길찾기91 2022. 7. 17.
728x90
반응형

인간의 잔인성

만약 보건소의 벽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벽들은 우리가 이미 읽었지만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 어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2015년, 나는 '세르주 비에이라 지 멜루’ 상을 받으러 오라는 초청을 받고 폴란드에 갔다.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나는 외람되어 루마니아 출신 미국 작가 엘리 비제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작가 자신이 「나이트」라는 자전적인 저서에서 들려준 이야기 말이다. 그것은 엘리 비젤이 가족과 함께 끌려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그 수용소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한낱 번호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날 밤을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맞은 그날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밤은 내 인생을 일곱 번 봉인된 길고 긴 밤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그 연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았던 그 아이들, 몸이 연기의 소용돌이로 변하여 고요하고 푸른 하늘 아래로 사라져간 아이들의 작은 얼굴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 몇 줄의 글을 인용한 것은 그것이 우리 현실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주민들이 배에서 내리는 동안, 60명쯤 되는 젊은이들을 검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뼈만 앙상했다. 탈수증과 기아 상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기름통에서 새어 나온 휘발유 때문에 화학 화상을 입기까지 했다. 휘발유가 자꾸자꾸 새어 나오면서 그들의 옷가지를 적시고 살갗에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 것이었다. 그들은 일주일 전부터 흔히 '3등칸'이라 불리는 갑판 밑의 선창에 갇힌 채 여행을 했다. 돈이 없어서 위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짐짝 신세가 되었다. 그들의 몸에는 고문을 당해서 생긴 상처들도 있었다. 칼로 그은 자국이라든가 그들을 감시하던 자들이 담뱃불로 지진 자국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이 거쳐온 리비아의 감옥은 새로운 형태의 강제수용소였다. 이주민들이 사막과 바다를 여행하면서 겪는 조건은 죽음의 열차를 탔던 유형수들의 조건과 비슷하다. 장벽을 세우고 난민들을 추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태도는 히틀러의 협력자들이 취한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그들처럼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아이들이 바다에서 죽게 내버려두거나, 난민들이 국경 지대의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조건을 견디며 살아가게 만드는 사람들도 그들만큼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이다.

두 차례의 중요한 만남을 거치면서 나의 그런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첫 번째 만남은 람페두사의 보건소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보건소는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의료 기관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때는 2014년 중반이었다. 폴란드의 특파원이자 시인인 야로스와프 미코와예프스키가 내 사무실에 와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이유가 분명치 않았지만,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전해 10월 3일에 벌어진 뒤로 계속되고 있는 일에 관해서 내가 느끼는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마음에 있던 말을 다 했다.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그 분노를 조금 전해주기를 바란 듯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이에는 파장의 동조나 공감 같은 것이 있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불과 30분 전에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뿌리가 다르고 삶의 역정도 다르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형제애의 본능이 벌거벗은 채로 무장해제된 상태로 있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확신, 우리가 남들을 밀어내기보다 우리 안으로 데려가는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1년하고 몇 개월이 지난 2015년 10월에, 나는 앞서 말한 '지 멜루' 상을 받으러 폴란드의 크라쿠프에 갔다. 야로스와프는 시내의 이러저러한 술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윽고 우리는 카지미에르즈라는 유대인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연금술'이라는 술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보드카를 마셨다. 그곳의 분위기는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내 세계와 단절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부두로 달려오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문득 시간이 멎었다. 야로스와프 덕분에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크라쿠프에서 두 번째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야로스와프 덕분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유대인 지구의 한복판에 있는 아우스테리아 호텔에서 우리는 '마지막 클레즈메르 명인'이라 불리는 레오폴드 코즐로프스키와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자 가수인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 때 연주를 맡기고 싶어했던 뛰어난 음악가이다.

야로스와프는 내가 누구이고 내 직업이 무엇인지 그에게 알려주었다. 연로한 음악가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야로스와프처럼 공감을 자아내는 어조로 몇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야로스와프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레오폴드는 스스로 인류의 벗으로 인정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양이었다. 나치 점령기에 레오폴드는 머리가 잘린 어머니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폐허로 변한 크라쿠프의 유대인 지구도 보았다.

“나는 모두를 잃었어요. 정말이지 모두를, 모든 사람들을 잃었지요." 그렇게 힘주어 강조하고, 레오폴드는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2년 동안 자기가 음악가로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사형에 처해지는 수감자들과 동행하면서 음악을 연주한 사연, 나치에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 음악을 연주해줬던 일,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보전한 숱한 경우를 회고하기도 했다. 자그마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그 아흔여섯 살 노인의 이야기 속에는 비통하고도 무시무시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야로스와프는 그때의 추억을 기록하기 위한 개인적인 글에서 이렇게 썼다. “피에트로는 늙은 클레즈메르 명인을 바라본다. 명인이 늙었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지만 영원히 고통을 겪고 있는 민족의 오랜 연륜이 느껴지게 한다는 뜻이다. 피에트로의 얼굴은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기 전날, 사도 궁전에서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인파를 향해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 지었던 표정을 생각나게 했다. 레오폴드는 일어나서 피에트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악수를 함으로써 두 사람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때로 인간의 잔인성이 우리의 예상을 뒤집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날, 람페두사의 부두에 250명의 이주민들이 도착했다. 검진을 해보니 모두 건강에 문제가 없었다. 버스들이 와서 그들을 수용 센터로 데려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언뜻 두 명의 군인이 이주민 두 명을 소형 트럭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 이주민 두 명은 비쩍 마르고 여행에 지쳐 있는 아프리카 젊은이들이었다. 소형 트럭이 출발하는데, 이상하게도 수용 센터 쪽으로 가지 않고 공항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급히 동료 의사를 부른 다음, 내 스쿠터 베스파를 함께 타고 그들을 뒤따라 달렸다. 이윽고 소형 트럭이 벌판길에서 멈춰 섰다. 건장하게 생긴 군인들은 이주민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이, 발길질과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다. 근거도 없고 이치나 도리에도 맞지 않는 폭력이었다. 나는 속도를 한껏 높여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이 더럽고 비열한 자식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사람들 건드리지 마. 당장 그만두라고!"

두 군인은 람페두사에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신, 누구예요? 왜 나서는 겁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신분을 밝히세요."

"그러는 너희는 누구냐?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면서 서부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벌어졌다. 그들이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그랬을 것이었다.

"우리 병영으로 따라오시오."

"너희야말로 나를 따라와야 해. 내가 병영에 가서 너희의 못된 버릇을 고쳐줄 것이거든."

우리는 그들과 거의 동시에 병영에 다다랐다. 병영의 사령관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르톨로 선생님,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내 뒤에 있던 두 군인은 그 장면을 보고, 그제야 자기들에게 고약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계속 치밀어오르는 부아 때문에 목소리가 자못 격앙된 채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하게 얘기했다.

"사령관님, 여기 이 두 사람을 몇 시간 내로 람페두사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온 세계 언론에 이들의 못된 짓을 알릴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이탈리아가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우리 의사들은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쓰는데, 이들은 가엾은 젊은이들을 이유 없이 때렸어요. 보세요. 이 젊은이들이 너무 맞아서 퉁퉁 부었잖아요. 도대체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하는 거죠?"

두 군인은 자기들의 야만적인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사령관은 당황한 기색으로 아무 말 없이 자기 부하들을 쏘아보았다.

이튿날 두 군인은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람페두사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나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만약 내가 그 군인들을 제때에 뒤쫓아 가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끝났을지 알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두 군인의 그런 행동은 자기네 동료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용을 떨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었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미를 보이며 매일같이 중요하고도 까다로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 두 명 때문에 일거에 신뢰를 잃을 뻔했던 것이다.

소금 눈물, 피에트로 바르톨로, 리디아 틸로타, 한뼘책방, 2020, 116-124.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