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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미국 남북전쟁 후 형식적으로는 흑인노예가 해방된 이후 모습 - <하얀 폭력 검은 저항> 수전 캠벨 바톨레티

by 길찾기91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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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후 형식적으로는 흑인노예가 해방된 이후 모습

 

군정이 실시되던 당시 버지니아 주의 주지사는 근로계약 준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대농장주가 노동자를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대농당주를 체포해 봐야 헛수고였다. "그런 부류의 살인을 저지르는 신사에게는 신사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대개 치안판사로 일하고 있어서 친구들을 심리하고도 그대로 방면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존 스코필드는 이렇게 보고했다.

또한 사소한 위반사항을 찾아내 이걸로 꼬투리를 잡아 근로계약을 어기는 지주들도 있었다. "수확한 작물이 들녘에 쌓이는 8월과 9월에 가장 극심했습니다. 별것 아닌 모욕이나 사소한 누락 하나면 일꾼들에게 등을 돌리고 마는 이유로 충분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계약에 따라 그들은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었지요." 흑인으로서 플로리다 주의 상원 의원을 지낸 로버트 미첨이 말했다.

본래 자신이 노예로 부리던 자유민들에게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에 격분하여 간단히 지급을 거절하는 대농장주도 있었다. "옛 주인이 말했습죠. '너는 이제 자유다. 하지만 계속 일하면서 옥수수와 먄화를 재배할수 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때 네 몫을 나누어주마.'라고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뉴베리 출신의 프레드 제임스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열심히 일했어요. 크리스마스가 돌아왔고 주인님은 스스로 알아서 먹고 살라며 말을 바꾸었어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나누어 주질 않았습니다. 우린 여물통에서 옥수수를 훔쳐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해방노예국은 직원을 파견해서 대농장주와 농부를 체포했다. 남부 백인들은 해방노예국이 자신들의 말을 거스르고 자유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민 편만 든다고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불만 가득한 깜둥이들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앨라배마 주의 대농장주 P. T. 세이어는 이렇게 불평했다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백인들을 체포했지요. 호송하는 사람을 붙여 데리고 가서 재판을 하고 감옥에 처넣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맡은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에는 의회가 제공하는 예산과 인력이 항상 부족했기에, 해방노예국으로서는 파렴치한 고용주나 클랜의 폭력으로부터 400만 명에 달하는 자유민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남부 11개 주에 파견된 해방노예국 직원 수는 기껏해야 900명이었고 카운티당 고작 직원 한 명이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카운티내 자유민 수가 1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렀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직원들이 감당해야 할 업무가 너무 과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하얀 폭력 검은 저항> 수전 캠벨 바톨레티. 돌베개. 2016. 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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