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이야기

빨갱이의 딸, 빨갱이의 조카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by 길찾기91 2022. 9. 28.
728x90
반응형

 

 

오빠는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가 오빠 앞길을 막은 게 큰어머니는 세상 떠날 때까지 천추의 한이었다. 오빠는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육사에 떨어졌을 때 나는 이제 막 열 살이 된 참이었다. 함박눈이 퍼붓는 산골의 겨울 오후, 아랫집에서 느닷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 소리였고, 큰집 언니들은 초등학교만 마친 뒤 죄 서울 공장으로 떠나 아랫집에 여자라곤 큰어머니뿐이었다. 울음이 잦아들지 않는데어머니 아버지는 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녁 차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엉덩이를 들썩이는 나를 어머니가 가만히 주저 앉혔다. 깜깜해진 뒤에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밥이나 묵세. 그런다고 굶어 죽을랑가!"

"글지라, 묵어야 또 살지라."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굼뜨게 몸을 일으켰다. 평생 로션 한번 바른 적 없는 어머니 얼굴에 하얀 버짐이 눈물처럼 번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큰집으로 달려갔다. 웬일로 큰집 가는 길에 눈이 수북했다. 평소에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눈 온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뚫어놓는 길이었다. 큰집 마당에도 눈이 수북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에 발자국을 남기며 막 큰집으로 들어서는데 부엌에서 큰어머니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큰어머니가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물을 휙 끼얹었다. 피시식 소리를 내며 하얀 눈이 녹아내려 내 앞으로 좁은 길이 뚫렸다.

 

"어무이!"

 

길수 오빠가 마루에 선 채 나지막하지만 날선 목소리로 불렀다. 길수 오빠 말이라면 꿈뻑 죽는 큰어머니가 웬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저 집 종자는 꼴도 보기 싫게 치와라!"

 

"어무이! !"

 

불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큰어머니가 휙 돌아섰다. 치맛자락에서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듯했다.

 

"난중에 오니라."

 

마루에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오빠가 그 말만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만 보면 하다못해 고구마말랭이라도 쥐여주면서 이번엔 몇 등 했냐, 요새는 무슨 책을 읽었냐, 곰살맞게 굴던 오빠였다. 오빠는 친척 중에서 나를 가장 예뻐했다. 나도 길수 오빠를 제일 좋아했다. 우리 집안에서 책 좋아하고 공부 좋아하는 사람은 오빠와 나뿐이었고, 그 때문인지 우리 둘만 공유하는 특별한 세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토요일 오후만 되면 한 시간씩 걸어 오빠 마중을 나갔다. 읍내서 학교에 다니던 오빠가 주말마다 집에 다니러 왔기 때문이다. 오빠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낡은 짐자전거를 샀다.

 

오빠 보고 자파서 여개꺼정 마중 나왔냐?"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은 오빠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짐칸에 앉혔다. 그러고는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않고 힘주어 페달을 밟았다. 리듬을 타고 오른쪽 왼쪽, 올라갔다 내려가는 오빠의 등에 뺨을 붙이고 있노라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이렇듯 경쾌하고 신날 것 같았다.

 

큰집 마당에 홀로 서서 나는 예감했다. 오빠와 나의 시간들이 끝났다는 것을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미안하고 무참했다. 나는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큰집을 나왔다. 순백의 마당에 더는 무슨 자국이라도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반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오빠는 봄이 되자마자 군대에 갔다. 몇 달 지나지 않은 가을, 마치 오빠 볼 면목이 없기라도 한 듯 아버지도 감옥으로 갔다. 물론 제 발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장에 갔다 담당 형사를 우연히 마주쳤고, 지금까지 못 본 척 하던 그가 무슨 일이었는지 아버지를 냅다 붙잡았을 뿐이다. 감옥에 다시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며칠 후에야 들었다. 아버지도 없는 반내골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어머니와 나도 읍내로 이사했다.

 

제대한 오빠는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간혹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오빠는 예전처럼 살갑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랬다. 어른이 된 오빠는 예전의 오빠가 아니었다. 누구와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해도 건성이었다. 몇 년 뒤, 연좌제가 풀리고 오빠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그 이후 오빠의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똑 부러지게 일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네, 승진을 제일 빨리 했네, 면장 딸이 홀딱 반해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야멸차게 딱지를 놓았네, 뭐가 모자라다고 저보다 한참 모자란 여자와 결혼을 했네, 마누라 닮아서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아들을 낳았네, 그런 정도가 내가 들은 전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함박눈 내리던 겨울날이 떠올랐다. 오빠의 마음속에도 그날이 사무치게 남아 있을 터였다. 그날을 마음에 품은 채로 오빠와 나는 멀어지면서 살아온 것이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죄라니!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2022, 77-81.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