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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마거릿 생어와 경구피임약 - <진격의 10년, 1960년대> 김경집

by 길찾기91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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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생어와 경구피임약

 

남자들은 도대체 왜 여자들이 그토록 피임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임신과 출산은 신성한 것이라는 믿음이 건전한 사회의 기본적 가치와 개념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거기에 반발하는 '못된 여자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그런 '반사회적'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평생 여성의 투표권과 피임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사회행동가 마거릿 생어 Margaret Sanger(1879~1966)1916년에 피임 클리닉을 열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 단체를 설립했다. 마거릿은 뉴욕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환자임에도 18번 임신하고 11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결핵에 유산까지 여러 번 겪으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결국 49세에 사망했다. 마거릿에게 어머니의 삶과 죽음은 매우 강하게 각인됐다. 훗날 그녀는 간호사가 돼 브루클린 빈민가의 이민 여성들을 치료하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위험한 낙태 시도로 죽는 이가 많다는 걸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고, '여성이 피임을 선택하고 행사할 권리'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고 장벽은 견고했다. 수십 년 동안 막강하고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컴스토커리 Comstockery' 혹은 일명 '컴스톡법 Cumstock Laws’이가장 크고 직접적인 장애물이었다. 컵스톡법은 주씨와 지역사회 수준에서 벌어지는 온갖 형태의 비도덕적·외설적 행동을 없애려는 입법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방음란규제법 Federal Obscenity Statute에 따라 '피임'을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외설적이라고 제재를 받는 분위기였으며, 도서관에서도 피임에 관한 책을 찾기 어려웠다. 미국의 22개 주는 피임약 판매를, 30개 주는 광고를 금지했다. 심지어 매사추세츠주는 여성에게 피임약 한 알만 팔아도 1,000달러의 엄청난 벌금을 매기거나 징역형을 선고했다. 우체국에서도 임의로 외설적인 내용물이라고 판단하면 접수를 거부할 수 있었다.

 

이쯤이면 한 개인이 그 장벽을 무너뜨린다는 건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마거릿 생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기 뜻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어떤 여자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여성은 자기 몸의 절대적인 정부가 돼야 한다.”

 

여성반란과 피임약 에노비드

 

그녀는 여성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쳤고, 성교육 칼럼을 쓰기도 했으며, <The Woman Rebel>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문맹인 여자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글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피임 정보를 그림으로 그려서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산아 제한Birth Control’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것도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당시 남성 사회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마거릿은 피임 클리닉 즉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었다는 이유로 공안질서방해죄로 체포됐다.

 

그렇게 온갖 수모와 제한을 받아온 그녀가 '피임약' 개발을 꿈꾼 것은 여성의 주체적인 피임법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다. 하지만 마거릿 혼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그녀의 오랜 친구로 여성참정권 운동가이며 억만장자였던 캐서린 매코믹 Katherine McCormick(1875-1967)이 그녀에게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고, 오랫동안 피임 연구에 몰두해온 내분비과학자 그레고리 핑커스Gregory Pincus(1903~1967) 박사가 참여하면서 함께 피임약 개발에 나섰다. 1920년대 말에 '인간의 과학The Science of Man'이라는 야심 찬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록펠러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의 투자 항목 중에 '섹스의 생물학적 탐구'가 포함돼 후원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는 피임약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에 우회적인 과정을 거쳐 1957년 어렵사리 피임약 에노비드Enovid가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지만 '임신 방지' 즉 피임이 아니라 '월경 조절'이라는 용도였다. 여전히 19세기에 제정된 낡은 법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피임약이 여성을 음란하게 만들고 비도덕적으로 타락시키거나 심지어 매춘을 조장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마련한 그 낡은 법규는 1873년에 제정된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1세기 가깝게 여성들의 목을 조였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여성들은 이미 그것을 피임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960년 드디어 공식적으로 경구피임약이 세상에 정식으로 등장했다.

 

페미니즘의 본격화

 

2016년 미국의 한 온라인 매체 <The Little Things1950~1960년대 미국에서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11가지 일'을 게재했다.

 

은행 계좌 개설(1974년 평등신용거래법 제정까지 남편이나 가족 중 남자의 허락이 필요했다), 배심원 되기, 법 집행,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하버드대학은 1977년까지 여성 입학을 허락하지않았고 예일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은 1969년에야 허락했다), 사관학교 입학(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는 1976년에 허락), 전투 투입, 피임약(몇 개의 주에서 1960년 인정, 출산휴가 1978년 임신에 대한 차별금지법 제정), 공공장소 모유(수유아이다호 주는 여전히 금지), 보스턴 마라톤 참가(1973년부터 허용), 우주비행사 되기(1978년 물리학자 샐리 라이드(Sally Ride, 1951~2012)가 최초)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20세기 들어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전쟁이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거나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건장한 남자는 전쟁에 나가야 했기에, 군수물자를 생산해야 하는 노동력을 여성이 제공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기계가 작동하는 공장의 생산방식은 이전처럼 남성의 큰 근육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기에 여성이 맡아서 수행할 노동 영역이 커졌다. 여성이 임금노동자가 됨으로써 경제적 독립체로서의 가능성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여성의 역할과 권리는 다시 축소됐다. 가부장제의 뿌리는 너무나 깊고 전방위적이었다. 일자리는 다시 남성의 차지로 돌아갔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엄마와 아내의 역할이 여성의 본능이며 본분이라는 사회적 압력은 이전의 페미니스트들의 성과를 무위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현실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겪은 여성들은 기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구조, 교육의 불평등, 문화적 차별 등에 의해 여성의 문제를 왜곡하고 난관에 빠뜨리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런 상황에서 생물학적 성별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는 페미니즘이 점차 가열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19세기부터 꾸준히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쟁과 투쟁이 있었고 참정권 획득이라는 승리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언적 차원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민운동과 뉴 레프트에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은 여성 이슈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됐다.

 

1962년 헬렌 브라운Helen Gurley Brown(1922-20121)Sex and the Single Girl이라는 책을 통해 독신 여성도 섹스가 필요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즐겨야 한다고 주장해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직은 보수적인 사고가 강했던 미국 사회에서 '정숙한여자들에게 섹스를 즐기라고 설파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 가야 할 길은 멀고 어쩌면 험난할지 모를 일이었다.

 

<진격의 10, 1960년대> 김경집, 동아시아, 15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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