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례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의 초등학교 3학년인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 LindaBrown(1943~2018)은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니는 게 불만이었다. 가까운 백인학교 섬너 Sumner초등학교에 다닐 수 없어 할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흑인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린다의 아버지는 딸의 전학을 신청했지만, 흑인이라서 안된다고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길고 지루한 소송 끝에 1954년 5월 17일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유명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판례로 무려 58년 만에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s. Ferguson' 판례를 뒤집었다. 이는 기존의 공고했던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논리를 허물고, '분리하면 무조건 불평등'이라는 법리를 제시한 것으로, 이 판결은 공공시설에서 인종분리 정책의 철폐를 주장하는 민권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얼 워런Earl Warren(1891~1974) 대법원장은 “공교육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원칙은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며 “분리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다”고 못 박으며 조속히 남부의 불평등한 인종분리 교육을 통합하라고 주 정부에 명령했다. 그러나 남부의 주에 속한 백인학교 3,000여 개 가운데 오직 600여 개만이 그 명령에 응했을 뿐 대다수가 반대하며 저항했다. 닫힌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지만, 여전히 옹벽은 단단했다.
그러다 흑백갈등이 단순히 소송에 그치지 않고 폭동으로 치닫는 일이 1957년에 발생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뛰어난 성적과 태도를 기준으로 미니진 브라운Minnijean Brown(1941~) 등 아홉 명의 흑인 학생을 뽑아 아칸소주의 리틀록 센트럴하이스쿨에 입학을 신청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례가 큰 힘이 됐다. 학교도 그 판례를 알고 있었기에 입학을 허가"했다.
문제는 아칸소주가 흑백통합을 극렬히 반대하는 곳이었다는 점이었다. 백인사회는 흑인 학생들의 백인학교 입학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주지사 오벌포버스Orval Faubus(1910~1994)는 주 의사당 앞에 모여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개학이 되자 주 방위군을 동원해 학교를 포위했다. 명분은 충돌에 따른 폭력 사태 예방이었지만, 노골적으로 흑인 학생 등교를 막기 위해서였고, 백인유권자들을 향한 야비한 정치적 선전 행위였다. 9월 4일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은 군인들의 저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고,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그들을 모욕하고 위협했다.
입학허가를 내준 교육위원회는 주지사의 결정에 당황했고, 연방판사는 주지사에게 따졌지만 포버스 주지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법무장관은 주지사의 직무 정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브라운 판결에 불만을 표했던 보수주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리틀록 사태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공수사단 2,000명을 리틀록 센트럴하이스쿨에 투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주 방위군과 연방군이 대치한 사건이었다.
1957년 9월 23일 마침내 아홉 명의 용감한 흑인 학생들은 공수부대의 보호 아래 최초로 백인학교에 등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등교를 반대한 2,000여 명의 백인 학생이 등교를 거부했고 흑인 학생 입학 반대파와 찬성파가 충돌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부는 아칸소 주 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시켜 주지사의 군사동원 권한을 빼앗고 공수부대원과 주 방위군 1만 명을 투입했다. 그들은 백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학업을 마친 어니스트 그린 Ernest Green(1941~)이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 됐다.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그 시기에 어니스트 그린의 졸업은 흑인의 인권과 자존심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례는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효력을 발휘했다. 1963년 6월 11일 여전히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앨라배마주의 앨라배마대학교에서 당시 주지사 조지 윌리스George Wallacel1919~1998)가 비비언말론Vivian Malone Jones(1942-2005)과 제임스 후드 James Hood(1942~2013)라는 두 명의 흑인 학생이 등록하려 하자, 수업 등록을 막기 위해 대학 강당의 문을 막았다. 이들이 등록할 것이라는 소식은 미리 알려져 있었고, 특히 앨라배마라는 지역에서 일어날 예정이었기에 백악관에선 두 학생을 위해 당시 미 법무차관 니컬러스 카젠바흐Nicholas Katzenbach(1922~2012)를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는 월리스 주지사가 흑인 학생의 등록을 막고, 미리 부른 기자들 앞에서 백인 유권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카첸바흐는 월리스에게 물러서라 했지만 월리스는 거부했다. 결국 카첸바흐는 바로 백악관에 이를 보고했고, 케네디는 즉시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그 내용은 "앨라배마주의 정의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하고 불법 조직을 제압할 것을 지원함”이었다. 이에 따라 아칸소에서 했던 것처럼 앨라배마의 주 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시켜 주지사에게서 통수권을 빼앗았다. 몇 시간 후 앨라배마주 방위군 사령관 헨리 그레이엄 Henry Graham(1916~1999)이 앨라배마대학교에 도착했다. 그는 주지사에게 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입구로부터 물러설 것을 요청했고, 결국 주지사가 흑인 학생들에게 길을 터주면서 해결됐다. 두 학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대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이 대학에 흑인 학생이 처음 입학한 것은 1956년이었지만, 견디지 못하고 곧 중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1957년 이 사건과 비슷한 리틀록사건이 일어나고 흑인들의 교육권이 강조되면서 다시 입학하는 소수의 흑인 학생들이 생겼다. 월리스 주지사는 백인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주립대학에 흑인 학생이 등록하는 게 고까웠다.
앨라배마주는 남부에서도 미시시피주와 더불어 흑백차별이 가장 극심한 곳에 속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개입과 명령으로 사태는 해결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흑인들의 분노와 울분은 점점 커졌다.
<진격의 10년, 1960년대> 김경집, 동아시아, 2022, 304-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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