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저항
오늘 부여된 공동 작업은 화단에 임시로 쌓아 둔 나뭇가지들을 묶어 리어카로 나르는 일이었다. 나무를 전지할 때 나온 것들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 일이 끝나 가는데도 감독인 전기부장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주어진 작업을 끝내고 각자의 초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더니 전기부장이 화를 버럭 냈다.
“감독인 내가 끝났다고 말해야 끝나는 것이지, 경비원들마음대로 일을 끝내? 지금 다시 리어카 들고 작업장으로 당장모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비원들이 폭발했다.
“하루 작업랑을 채우면 끝내는 게 당연하지, 일이 끝났는데도 다시 모이라고? 감독자는 소변보러 간다더니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가 이제 나타나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거요?”
집단으로 전기부장에게 대들었다. 큰소리가 오가자 관리실 소장이며 직원들뿐만 아니라 경로당 노인들과 주민들도 다 나와서 이 광경을 구경했다. 경비원들이 다 같이 항의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으로 한 몸이 된 순간이었다.
나는 경비원들이란 화도 낼 줄 모르고 그저 순종만 하는사람들인 줄 알았다. 다들 나이가 많아 갈 곳 없는 이들이어서 부당한 일에도 분노하거나 저항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참고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첫 저항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경비원들은 단체로 시말서를 써야 했고 주동자로 지목된 두 사람은 전기부장에게 따로 용서를 빌어야 했다. 어차피 승패가 미리 정해진 싸움이었다. 단결해도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지푸라기도 많으면 코끼리를 묶을 수 있고,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낸다던데, 우리는 다 합쳐 봐야 네 명에 불과했다.
할당된 작업을 마쳐도 감독자의 해산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전기부장의 말은 억지였지만, 밥줄이 한순간에 끊길 수 있는 판에 무슨 '투쟁'을 할 수는 없었다. 전기부장의 횡포 때문에 경비원들은 밤늦은 시각에야 각자의 초소로 돌아갈 수 있었고, 밤늦도록 그동안 하지 못한 각자의 업무를 처리했다.
겨울 해는 일찍 저물었다. 희미한 외등 아래에서 낙엽을 쓸고, 배수구를 청소하고, 재활용품 마대를 정리하고, 스티로폼을 따로 묶고, 음식물 쓰레기를 담았던 비닐봉지들을 추려냈다. 소주병과 맥주병, 잡병과 깨진 유리 조각들을 각기 다른 마대에 담았다. 현관 외등을 하나하나 켜고, 주차장의 꽁초를 줍고, 생활 쓰레기를 지정된 곳으로 내놨다.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는 안 되는 나무판자와 액자 등의 폐기물들을 추려 내 아파트 구석의 임시 보관처로 옮겼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을 망치로 잘게 부숴 자루에 담고, 김장하고 버린 배추 부산물이며 마늘을 까서 생긴 부산물들도 마대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차량통제 차단기 초소 근무가 있었다. 방문하는 외부 차량에 방문증을 발급해 주고, 불법 주차 차량에 스티커를 붙였다. 찾아가지 않은 택배를 각 세대로 배달해 주고, 주인이 없는 세대에는 택배를 찾아가라는 안내문을 현관문에 붙였다. 그리고 주민들의 전화 호출에 달려가 이런저런 심부름을 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내일부터 전기부장은 아마 더 혹독해질 것이다.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후마니타스, 2020,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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