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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참새 소탕 작전 -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by 길찾기91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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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소탕 작전

 

마오쩌둥이 주도한 '제사해 운동除四害運動'은 성공했지만 역사상 최악의 피해를 낳은 공공보건 정책으로 꼽을 만하다. 제사해 운동은 네 가지 유해 동물을 박멸하는 운동으로, 범국민적 협동으로 애초 목표를 엄청나게 초과 달성했다. 그리고 적어도 네 목표 중 두 목표는 전 국민의 건강 개선에 크게 공헌했다. 넷 중 둘이 성공이라니 꽤괜찮은 것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중 네 번째 목표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원인은 생태계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성을 깨닫지 못한 데 있었다. 인간은 '가만 있자, 여기는 한 종을 새로 도입하고, 저기는 두어 종을 제거하면 좋겠군' 하는 식의 생각을 자꾸 한다. 그럼 모든 게 더 좋아지겠지 하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결과'가 일어나고, '연쇄 반응''연계 고장'이란 단짝 친구들이 자동으로 따라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1949년 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집권했을 당시,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했다.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봉건시대를 벗어난 지 이제 수십 년밖에 안 된 농업 국가를 현대적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한다는 마오쩌둥의 목표를 이루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중에는 당연하고 적절한 조치들도 있었다. 전 국민 예방접종, 위생 개선이 그랬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국난의 책임을 동물들에게 돌리면서 시작됐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퍼뜨린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모기와 쥐를 잡는 범국민적 운동을 기획했다. 그런데 마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사해 운동이 아니라 제이해 운동이었으면 딱 좋았을 듯한데, 거기에 두 동물을 더 추가한 것이다(전문가들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마오쩌둥은 파리도 성가신 놈들이므로 박멸해야 한다고 했다. 네 번째 유해 동물은? 참새였다.

 

참새는 곡식을 쪼아 먹으니 나쁜 놈이었다. 1년에 참새 한 마리가 먹어치우는 곡식의 양이 4.5킬로그램에 달했다. 인민을 먹여 살릴 소중한 곡식이 그만큼 사라지는 것이다. 참새 100만 마리를 잡으면 인구 6만 명을 더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논리였다.

 

제사해 운동은 1958년에 출범했고, 엄청난 기세로 진행되었다. 전국에 벽보가 붙어 남녀노소 누구나 의무적으로 유해 동물을 최대한 많이 잡도록 독려했다. “새는 자본주의의 대표 동물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파리채에서 소총까지 다양한 무기를 들고 소탕에 나섰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참새를 새총으로 쏘는 훈련을 시켰다. 주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깃발을 흔들며 원수 같은 참새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기도 하고, 냄비와 솥을 연신 두드려 나무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 참새는 날다 지친 나머지 떨어져 죽곤 했다. 상하이에서 운동 개시 첫날에 잡힌 참새가 20만 마리에 달한다고 추산된다. 인민일보에는 이런 글귀가 실렸다. “승전의 그날까지 그 어느 전사도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적어도 내건 목표를 완수했다는 점에서는 그랬다. 인간 대 유해 동물의 싸움에서 인간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제사해 운동의 결과로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뭔가가 잘못되었음이 곧 드러났다. 10억 마리의 참새들이 곡식만 훔쳐 먹었던 게 아니었다. 참새들은 해충도 잡아먹었다. 특히 메뚜기가 참새의 밥이었다.

 

10억 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 매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 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떼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1959년 마침내 전문가(참새 소탕 작전은 위험하다고 일찍이 경고했던 조류학자 정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공식 유해 동물 명단에서 참새가 빠지고 대신 빈대가 들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참새 10억 마리를 박멸하고 나서 ', 이게 아니네, 취소' 하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물론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었다. 당의 주도에 따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 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 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게다가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우수한 실적을 보고한 공무원들에게 포상이 주어지다 보니 국가 지도자들은 모든 게 잘되고 있고 식량 수급이 넉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등 기상악조건이 몇 년간 이어지던 끝에 별안간 식량 비축분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참새 박멸과 그로 인한 메뚜기 떼의 창궐이 대재앙을 낳은 주요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500만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니 더 오싹해질 따름이다.

 

이 참사가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뒷일을 아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다면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담할 수 있어도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자. 앞으로라도 명심하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2004, 중국 정부는 사스SARS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사향고양이에서 오소리까지 각종 포유동물을 집단 살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모자라는것일까.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윌북, 2019. 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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