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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걷다

방가방가 방콕 5 – 6/13(목) 옥류식당 평양랭면, 아유타야 선셋투어

by 길찾기91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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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방가 방콕 5 – 6/13(목) 옥류식당, 아유타야 선셋

 

 

 

오후에 일정이 있으니 오늘 오전엔 내 할 일에 몰입. 할 일은 쉬는 것(?). ㅋ

아침도 간단히. 시원한 호텔이라 집중도 높게 쉼.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정오쯤 체크 아웃.

 

신선한 경험을 위해 1100미터나 떨어진 평양옥류식당을 향했다.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풍미가 있는 평양랭면 한 그릇. 2007년 6월 평양 옥류관에서 먹었던 맛의 기억이 희미한데 그러고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리 섬세한 미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감.

 

 

평양옥류식당에서 먹은 평양랭면.

 

 

 

밖이 더우면 안이 좋지. 션한 커피 마시러 출동. 션한 곳은 무조건 좋은 곳.

 

오후엔 태국의 두번째 왕조인 아유타야 왕조의 흔적을 찾아 떠난 길. 쑤코타이왕조, 아유타야왕조, 톤부리왕조, 짜끄리왕조 순서. 33대에 걸친 왕을 냈던 아유타야왕조는 이제 역사로만 남아 있다. 역사의 현장을 방문해 보니 왕궁과 사원이 즐비하다. 하지만 고색이 창연하되 스러져가는 느낌.

 

실제 상당수의 탑들은 지반침하 등으로 기울어져 있고 일일이 수리하기에는 벅찬 상황으로 보인다. 태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왕조였지만 지금은...

 

아유타야 왕조는 14-15세기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고 16세기 초부터 태국 역사상 최초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과 교류를 맺기도 했었다. 지금은 찬란했던 불교 유적지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사원을 순례하다보니 그 시절이 상상되기도 한다.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만 듣고 떠올리는 상상의 그 때. 우리 조선시대쯤 일이다.

 

아유타야 왕궁 내에 있는 왓 프라 씨 싼펫은 거대한 3개의 쩨디가 인상적이다. 1767년 버마(현재 미얀마)의 침입으로 16m의 금동 입불상이 파괴됐다. 왓 로까이쑤타람의 42m에 달하는 와불은 방콕 왓 포 사원에 있는 와불을 떠올리게 하다. 왓 마하탓의 나무가 감싸고 있는 부처의 두상은 아유타야의 상징이 되었다.

침탈하던 이들이 금으로 장식된 머리 부분을 다 잘라가고 남은 몸체만의 불상들이 즐비하다. 그러다가 일부 떨어뜨리고 간 머리 부분이 보리수 아래 있다가 자라면서 머리가 뿌리에 끼여 성장했다. 신비하기도 하지만 처연하기도 한 기분.

 

쑤코타이 왕조 - 타이 족은 13세기에 앙코르 왕조에서 독립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세웠다. 수코타이 왕국의 3번째 통치자였던 람캄하엥 왕(1279~98경 재위)이 북쪽으로 지금의 라오스, 서쪽으로 안다만 해, 남쪽으로 말레이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 8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이 고대도시는 람캄하엥이 다스리는 동안 시암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러나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이웃 왕조가 1351년 아유타야를 수도로 세운 이후부터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1438년 아유타야 왕국에 정복·합병되었다. 15세기말과 16세기 초에 이 지역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 다음백과
아유타야 왕국(อาณาจักรอยุธยา) - 시암의 첫 번째 왕국이다. 1351년에서 1767년까지 존재하였으며, 수도는 아유타야였다. 태국에서 일어났던 다른 왕조와 마차가지로 중국과 인도, 유럽을 잇는 중간에 위치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무역이 나라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아유타야 왕조에서도 왕가를 중심으로 독점 무역을 했다. 주로 중국에 쌀을 수출하여 국력을 기르고, 조선, 일본, 류큐국 등과 안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 크고 작은 섬들 부, 아랍, 페르시아나 서양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부를 바탕으로 아유타야에서는 당시 번영하고 있던 크메르 문화를 흡수하면서, 중국, 유럽, 페르시아 등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이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 위키백과
톤부리 왕국(ธนบุรี)(1767- 1782) - 버마에 의한 아유타야 왕조의 붕괴 후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던 태국의 정통 왕조의 하나로 수도는 톤부리였다. 중국계 태국인이었던 딱신 대왕에 의해서 만들어진 왕조이다. 1767년 동남아시아를 거의 400년에 걸쳐 지배한 이후, 아유타야 왕조는 붕괴되었다. 왕궁은 불타고, 영토는 버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버마의 점령기 동안, 타일랜드는 빠르게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러한 저항 운동은 남동쪽의 짠타부리에 근거를 두고 시작되었으며, 1년이 지나지 않아 딱신은 버마 점령군을 물리쳤다. 그는 지금의 차크리 왕조의 전신으로 메남의 어귀에서 20 km 떨어진 짜오프라야 강 서안의 톤부리를 기반으로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인 17688월 딱신은 톤부리의 왕좌에 올랐으며, 끄룽 톤부리 왕(일반적으로 딱신 대왕)으로 이름을 짓고 청조에 사자를 보내 책봉을 요구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딱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청조와의 교섭은 1769년에 호전되어 교역을 재개하였고, 무기나 철, 유황 등의 전략 물자 획득의 길을 열었다. 그는 태국 중부를 빠르게 재통일하였으며, 1769년 서쪽 캄보디아를 정벌하였고, 그 이후 남쪽으로 진격을 하여 페낭과 테렝가누 주를 포함한 말레이 반도에 대한 태국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태국 내의 수도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774년 버마를 기습했다. 1776년에는 치앙마이를 함락했고, 톤부리와 란나 왕국을 영구 통일했다. 1778년 톤부리는 비엔티안을 함락하여 라오스에 대한 지배권을 태국으로 종속시켰다. 딱신 왕의 일대 15년간 계속 되었지만, 왕조 말기, 딱신 왕을 도왔던 장군 짜오 프라야 마하카삿트 슥크 차그리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폐위, 처형하고 짜오프라야 마하카삿트 슥크(라마 1)가 왕으로 오르면서 왕조의 막을 내렸다. - 위키백과
짜끄리 왕조(태국어: ราชวงศ์จักรี 랏차웡 짜끄리, Chakri Dynasty) - 태국의 현 왕조이다. 이 왕가의 수장은 태국의 국왕이 된다. 이 왕가는 1782년 딱신 대왕의 톤부리 통치를 마지막으로 라따나꼬신 시대 이후부터 태국을 통치해 왔으며, 시암의 수도는 방콕으로 옮겨졌다. 풋욧파쭐랄록 왕이 세웠다. 1782, 딱신 왕조가 망하고, 짜끄리 장군이 수도를 방콕으로 정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19세기 말에 대나무 외교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압박 속에서도 쳉훙 왕국 등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독립국 가운데서는 홀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사회주의 정권이 계속해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본주의를 꿋꿋하게 지켜냈다. 그러나 군부 집권을 피할 수 없었는데, 1992년 라마 9세가 개입하여 군부는 실각, 이후 민주정이 태국에 들어섰다. 태국 국민들은 국가의 독립을 지켜내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왕과 왕실에 대해 큰 존경을 보인다. 아직 태국은 군인의 발언권이 강하고 여러 번 쿠데타가 일어나지만, 국왕은 쿠데타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국왕이 승인하지 않는 쿠데타는 무효이다. - 위키백과

 

 

 

 

 

 

 

며칠 다닌 주마간산으로 얼마나 알겠냐마는 태국은 왕에 대한 존중이 정말 대단하다. 신임 라마 10(와치라롱껀)의 사진은 가는 곳마다 보인다. 벽에 걸린 왕의 사진도, 거리 곳곳에 설치된 사진 시설들에서도 발견한다. 너무 많이 봐서 꿈에 나올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심지어 지폐에도 왕이 나온다. 모든 지폐의 인물은 왕이다. 특이한건 9대 왕 사진이 있는 지폐가 있고 현 10대 왕의 사진이 있는 지폐가 있다는 것.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지폐를 바꾼단다. 지금은 바뀌는 과정이라 같은 액수의 두 지폐가 혼용되는 중. 왕에 대한 무례한 행동이나 말은 응징을 부른다는데 본 일은 없다. 존경받는 왕 라마 9세는 무려 70년간 재위했고 그 덕에 라마 10세는 왕세자로만 45년을 지냈다.

 

 

위 존경받는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아래 라마 10세.
2019년 5월의 대관식을 기념한 기념조형물들이 거리마다 있다.

 

 

 

아유타야 지역을 둘러보고선 작은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선셋 감상 출발. 저물어가는 하루를, 그리고 마무리 중인 여행을 생각하는 차분한 시간. 가이드의 성화에 여러 포즈로 사진도 찍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는 폭우. 난데없는 상황이었지만 서로 배려하며 더 친근해진. 처음 만난 이들과 협력하는 따뜻한 즐거움. 1시간 정도의 우당탕탕 선셋 감상은 그렇게 끝났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가이드의 강권에 따라 시키는대로 포즈 취하는 중. 뻘쭘.
배타고 선셋 보는 중.

 

 

이제 정말 마무리할 시간. 체크아웃 하면서 맡겨둔 캐리어를 찾고 공항으로. 숙소가 있던 나나역에서 BTS 모칫역 방향으로 다섯 정거장인 파야타이역에서 수완나폼 공항으로 가는 스카이 트레인으로 갈아타고 수완나폼 공항으로.

 

이로써 지상철 BTS, 지하철 MRT, 완행 기차에 이어 공항철도 SRT까지 섭렵했다. 철길은 종류대로 다 경험. 이 동네 교통수단 중에 툭툭이만 안타봤넹.

 

수완나품공항이 꽤 크네. 올 때는 심야라 대기하던 차를 타고 바로 이동해서 외관도 내부도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가 새삼 확인. 배는 고픈데 뜨끈한 국물만 땡기는 상태. 모든 식당을 둘러봐도 한식은 없었다. 결국 컵라면으로 내 몸의 국물부족 사태를 해결했다.

 

발권하러 가니 왜 내 뱅기표엔 우선탑승이라고 선명하게 적어주는건지.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었다. 동행 내비두고 내 혼자 우선탑승 해봐야 재미도 없으니. 더 중요한 사태는 이후. 난 의리상 일반탑승 줄에 서서 착실히 기다려줬건만 이 눔은 내 앞에 새치기한 아지매들보다 앞에서 뱅기표 확인하더니 먼저 버스타고 뱅기로 가부렀다. 무슨 핑계를 대도 맘에 안드는 눔. ㅋ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난 일단 아메리카노 한 잔 사먹고 잘거다. 이 눔이 쏜다 했으니. 깨보면 인천이겠지?

 

 

 

 

* 이 글은 2019년 9월 6일(일)부터 13일(목)까지 태국 방콕으로 자유여행을 다녀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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