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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증오비와 위령비가 말하는 것 (이길보라) -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곽소진 서새롬 조소나, 북하우스

by 길찾기91 202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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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트남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합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하미 학살 위령비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었다. 학살로 희생된 마을 주민 135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 건립 과정을 듣고 나는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하미 마을에 위령비가 착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위령비에 새겨질 비문을 적었다. 학살의 과정을 묘사한 비문이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둔 2001년 복지회는 마을 사람들이 적은 비문을 지울 것을 요구했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자신들의 언어로 서술한 비문을 지우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복지회는 비문을 지우지 않는다면 위령비 건립을 취소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가 개입하는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마을 주민들이 외부의 압력에 저항한 끝에 결국 비문은 수정되지 않았으나, 비문 위에 연꽃 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로 제작되었다.

 

하미 학살 위령비 건립에 얽힌 이야기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의 '협상적' 태도를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 이전에 내가 울컥했던 이유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넘어, 이 대리석 벽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연꽃 그림을 보게 된 후로 나는 어떤 마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보이지 않도록 가려두는 마음에 대해서. 그 마음은 현재의 내가 20세기와 완전히 선을 그을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이었다.

 

2014년 겨울, 하미 마을에서 그 대리석을 직접 마주했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단단한 대리석 벽을 보고 있을 때에, 그림 너머를 응시하는 눈들이 있었다. 연꽃 밑에 가려진 글자를 볼 수 있는, 아니 기록 이전의 사실을 보았던 눈들이었다. 벽 너머의 세계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벽이 너무 단단하고, 오래된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선 먼저 벽 뒤로 돌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보기 위해서는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를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하니까.(곽소진)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곽소진 서새롬 조소나, 북하우스, 2021, 52-53.

 

 

 

 

증오비와 위령비가 말하는 것 (이길보라)

 

2015년 2월 26일, 버스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 마을에 멈춰 섰다.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는 430명의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여성 268명, 노인 109명, 어린이 182명. 그중 7명이 임산부였다. 꽝응아이성에서만 현재까지 18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공식 확인되었으며 1,7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버스에서 기행단이 하나둘 내렸다. 마을 규모와 비교하여 제법 큰 버스였다. 앞 유리창에는 한글로 '베트남 평화기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큰 버스를 타고 베트남 중부를 다니는 것이 맘에 걸렸다.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들, 마을 사람들의 일상에 무작정 들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잠깐 눈물을 흘리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행위를 옳다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평화기행의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자꾸만 겉돌며 무리 끝에서 일행을 뒤쫓았다. 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활동하는 이들이었지만 불편한 마음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문제는 평화기행도, 기행단도 아니라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칭하며 이곳에 왔던 역사가 있어서, 그가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가서, 그 돈으로 우리 집이 먹고살 수 있어서 그랬다. 나는 뭣도 모르고 그 덕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었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미 제국은 남조선 용병을 투입해 병력을 대체했다. 흉악하고 피에 굶주린 본성을 지닌 그들은 이 작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총격을 가해 수천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을 싹 쓸어버려 수많은 고통과 비탄을 자아냈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쭈레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용병 일당은 청룡여단 1개 대대를 보내 빈호아의 모든 마을에서 소탕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쭈옹딘(도 언덕)폭탄 구덩이에서 36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다음 날인 1966년 12월 6일 아침,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프억) 마을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동포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온갖 무기와 수류탄을 앞 다투듯 퍼부어 273명을 살해했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고 생존자는 단 14명이었다. 그들은 이어서 찌호아 마을을 습격해 방마다 집중 사격을 가하고 딘짭 할아버지의 집을 불태워 12명을 죽였으며, 살해가 끝난 후 응옥흐엉 마을로 몰려가 여든 살 노인을 잡아다 참수하여 머리를 들판 한가운데 진열하니 절통한 광경이 펼쳐졌다.

- 꽝응아이성 빈호아 학살 증오비 비문(출처: 한베평화재단)

 

증오비였다. 겉보기에도 끔찍하고 참혹한 이미지의 증오비. 마을로 진입하는 통로이자 지역 인민위원회 건물 근처에 위치한 비석 앞으로 마을 사람들이 지나갔다.

 

“빈호아 마을에는 오래된 자장가가 있습니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놓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자장가에 얽힌 증오가 하늘을 찔렀다. 아직도 베트남 중부에는 학살 이후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 있는데 빈호아 마을이 그중 하나다. 참배를 마치고 버스로 돌아가는데 마을 사람과 마주쳤다.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신짜오."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당혹스러웠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어 관광버스에 서둘러 올랐다.

 

다음 날, 빈딘성 떠이빈사 [구(舊) 빈안사] 빈안 학살 49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고자이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380명의 희생자 명단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무명'이라는 뜻의 '보자인 (VoDanh)'이라는 이름이 많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한 아이들과 이름을 찾지 못한 시신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베트남 중부의 수많은 위령비에는 수많은 ‘보자인'이 있다. 한 시간 만에 380명이 학살을 당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은 이 학살에도 마찬가지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베트남 중부에는 증오비만 있는 마을도, 위령비만 있는 마을도, 둘 다 있는 마을도 있다.

 

"학살의 양상이 잔인했거나 피해 규모가 컸던 지역에서 주로 증오비가 건립되었던 것 같아요. 증오비가 세워진 이후에 시간이 지나면 위령비가 세워져요. 한국 시민단체나 사람들이 돈을 모아 함께 위령비를 세우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끼리 모금하여 세우기도 하죠. 생각해보세요. 전쟁이 막 끝난 후 얼마나 가난했겠어요. 그러나 난데없이 학살을 당한 마을 사람들은 절대 그날 그 일을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오늘 당장 먹을 쌀도 없는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증오비를, 위령비를 세운 거예요. 증오비와 위령비는 그렇게 세워져요."

 

증오비가 선 곳은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기 어렵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증오가 있기 때문이다. '증오'라는 단어. 한평생 쓸까 말까 한 단어를 이들은 가슴에 품고 산다. 그 마음 위에 세워진 비. 여전히 베트남에 남아 있는 증오비 옆에 위령비를 세우는 일, 그때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이들의 이름을 틀린 철자 없이 똑바로 기록하고 향을 태우는 일이 가장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새롬과 소진을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고 향불을 올려야 한다는 걸. 죽은 이들의 넋을 먼저 위로해야 한다는 걸. 이들이 허락해야 우리는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위령제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술잔을 내밀었다. 사양하지 않고 다 받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는 새롬도, 술을 잘 못하는 소진도, 나도. 학살로부터 4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정부와 학살 당사자들로부터 공식적인 사과가 없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곽소진 서새롬 조소나, 북하우스, 2021, 6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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