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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전염병은 공정하다" 유럽도시기행1, 유시민

by 길찾기91 202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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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774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같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열여섯 살 먹은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루이 16세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왕과 왕비, 왕자, 공주들의 생애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전염병이 매우 '공정' 해서 신분과 계급을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등 전파가 쉽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대부분 농업혁명으로 인간과 가축의 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생겼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균과 바이러스 등 미생물이 물이나 체액, 공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인을 모르니 예방법과 치료제가 있을 수 없었다. 부르봉 왕가의 권력자들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은 이가 그토록 많았으니 훨씬 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았던 백성들은 얼마나 죽었을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 하다. 권력자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그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 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유럽도시기행1> 유시민, 생각의길, 2019. 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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