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이야기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유럽도시기행1, 유시민

by 길찾기91 2020. 10. 13.
728x90
반응형

 

종교적 독단이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정관념 위에서 일부 계급만 주권을 나눠 가지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일지라도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아테네의 역사는 증명해 보였다. 아테네 시민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지속 가능한 민주정의 불가결한 조건인데, 호모 사피엔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조건을 완비하지 못했다. 어찌 아테네 시민을 욕하겠는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B.C.405, 예고된 재난이 아테네를 덮쳤다.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 함선 180척을 궤멸한 후 물샐틈없이 도시를 포위하자 모든 동맹국이 등을 돌렸다. 스파르타가 제시한 항복 조건에는 민주정의 폐지가 들어 있었다. 시민들은 민회를 열어 민주정을 폐지하고 30인 참주제를 도입했다. 스파르타의 앞잡이가 된 30인 참주는 한 해 동안에만 1만 명 넘는 시민을 죽였다. 한때 노예를 포함해 30만 명이나 되었던 아테네 인구는 6만 명으로 오그라들었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늘고 일어나 참주정을 전복하고 민주정을 회복했다. 그런데 그 직후 아테네의 젊은 시민 세 사람이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혐의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B.C 3995, 소크라테스는 프닉스 언덕 강당의 종교 법정에 섰다. 500명의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는 첫 번째 투표에서 근소한 표 차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에게 아첨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고 냉정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배심원들은 사면 여부를 결정하는 두 번째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사면을 거부했다. 잘난 척 하는 듯 보인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그들을 불쾌하게 한 것이다.

 

델로스 축전 순례 행사 때문에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던 한 달 동안 소크라테스는 법정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옥에 갇혔다. 제자와 친구들이 탈출 계획을 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나갈 수 있었는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 당근즙을 마셨다. 그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오래된 가짜 뉴스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뿐이다. “폴리스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내린 결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가 그렇게 할 경우 폴리스가 존속할 수 있는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장과 쇠락과 죽음, 그리고 일시적 부활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독당근즙을 마시는 행위로 자신이 던진 철학적 질문에 대답했다.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 죽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테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유럽도시기행1> 유시민, 생각의길, 2019. 71-74.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