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는 꼭두새벽에 조회가 열렸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서도, 내 컨디션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기분이란.
갈수록 게을러지는 나를 발견한 시점에서 읽은 책이다.
조선시대에 내가 관직에 있었더라면 며칠 가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조선 시대에는 새벽에 임금과 신하들이 참석하는 궁중 조회가 열렸다. 새벽에 여는 조회로는 아일조회와 대조회가 있었다. 그 밖에도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열리는 상참 등이 있었다. 궁중 조회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중요한 정무를 보고하고 임금이 결정하는 정사를 행하는 자리였다.
새벽에 열리는 아일조회는 아조衙朝, 또는 조참朝參이라 했다. 건국 초기에는 5일마다 열려 매달 6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매달 4번으로 줄어들었다. 매달 6번씩 할 경우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에 열렸다.
태조 5년 10월부터는 아일조회 시에 5경 4점에 신하들을 대궐 문에 모이게 하였다. 5경 4점이면 대략 새벽 4시 35분경이다. 음력 10월의 일출 시간이 대략 오전 7시경이므로 상당히 이른 시간에 모였던 셈이다. 일단 대궐 문에 모였다가 궁전으로 가서 정렬하는 시간이 걸렸을 테니, 아마도 새벽 5시경에 조회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일출 시간이 가장 이른 음력 4월에는 5시 10분경 해가 뜨고, 가장 늦은 음력 1월에는 7시 30분경에 해가 뜬다. 어쨌든 아일조회는 해뜨기 전에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새벽에 여는 조회로는 아일조회 외에도 대조회가 있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의 새벽에 정1품에서 종9품까지의 모든 문무백관들이 궁전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어 결재를 받는 큰 조회였다. 대조회 시는 5경 1점에 백관들이 대궐 문에 모이게하였다. 5경 1점이면 대략 새벽 3시경이어서 아일조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열렸다. 그야말로 꼭두새벽에 대조회를 열었던 것이다.
새벽 3시까지 대궐에 도착하려면 2시경에는 기상해야 한다. 그만큼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니 조선의 관리들은 자연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활화되어야만 했다. 조선에서 관리로 출세하려면 모름지기 아침형 인간을 넘어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올빼미형 인간은 절대 출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벽에 여는 조회는 신하들은 물론 임금에게도 고역이었나 보다. 태조 7년 윤5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임금이 조회를 열었다. 대간에서 임금이 조회를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날 임금이 근정전 에 앉아 대궐 뜰에 화롯불을 피우게 하고 도승지에게 명하였다.
"의정부와 중추원의 관리들 중 정사에 관하여 말할 사람은 바로 나와 나의 면전에서 아뢰고 정오가 되어 북이 올리면 물러가게 하라.”
윤5월인데도 어둡고 추우니까 화롯불까지 피워 놓고 조회를 했던 것이다. 새벽에 시각한 조회는 정오까지 이어졌다. 참석한 임금이나 신하들이 모두들 싫증을 내었을 것이다.
며칠 후에도 새벽에 조회를 하며 임금의 면전에서 증요한 정책을 직접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이른 새벽에 근정전에 앉았는데, 예관이 신하들에게 절을 하여 예를 갖추는 배려를 하라고 외쳤다. 임금이 이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아일에 조회를 할 때는 반드시 배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임금이 예조에 명하였다.
"각 관청의 자질구레한 사무는 모두 친히 결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말할 만한 일은 마땅히 각기 면전에서 아뢰게 하라."
모든 관리들이 모두 황공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정도전에게 물었다.
"내가 말한 것이 어떠한가?"
“옳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내가 조회를 보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 오늘은 어디 한 사람도 면전에서 아뢰는 이가 없는가?”
임금이 신하들을 꾸짖자 정도전이 답했다.
신이 속된 말로 비유한다면 이렇습니다. 벗들이 연회 할 적에 서로 화답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노래를 부르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하물며 임금 앞에서 정사를 아뢰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그렇구나.”
그러고 나자 비로소 대사헌 성석용과 형조 전서 유관이 나서서 정무를 아뢰었다.
이날의 아조는 해가 뜨기 전에 끝났는데, 아조를 마치면 각 관원들은 자기가 속한 관청으로 출근하였다. 곧바로 출근하지 않고 다른 사무를 보는 사람들은 사유를 사헌부에 알리도록 하였다. 조회를 끝낸 임금은 아직 날이 새지 않아 다시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좌우 정승과 정도전, 의성군, 남은 등을 부른 임금이 누각에 앉아 술자리를 베풀어 모두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마셨다고 한다.
태종 1년 7월에는 아일조회를 새벽 해뜨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뜨면 파하도록 조정하였다. 정오까지 조회를 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종 16년 6월에는 의정부와 중추원의 70세 이상 관원은 아일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치를 취하여 연로한 관원들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기도 했다. 이런저런 조치들을 보면 꼭두새력에 조회에 참석하기가 임금과 신하들 모두에게 고역이었음에 틀림없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정구선, 팬덤북스, 2014. 50-53.
'책과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간의 역할 - 사헌부와 사간원 (0) | 2020.10.28 |
---|---|
그 많던 베트남 보트피플은 어디로 갔을까 (1) | 2020.10.27 |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토마스 프랭크 (0) | 2020.10.22 |
신문고는 정말 아무나 칠 수 있었을까,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0) | 2020.10.21 |
군사법정에 선 박정희 소령, 실록 군인 박정희 (0) | 2020.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