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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신문고는 정말 아무나 칠 수 있었을까,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by 길찾기91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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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는 정말 아무나 칠 수 있었을까

 

텔레비전 퀴즈 프로에서 힘없는 백성이 하소연할 길 없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치는 북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고' 라 대답할 것이다. 물론 정답이다. 태종 2(1402) 7월 신문고가 처음 설치된 것은 바로 그런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문고는 억울한 사연이 있는 백성이라면 누구나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문고를 치는 절차를 밝힌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에게 소장을 내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고 정해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절차를 건너뛰어 신문고를 두드릴 수는 없었다. 설사 절차를 다 밟고 신문고를 두드렸다 하더라도 고발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엄한 벌이 뒤따랐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왕들이 신문고가 울리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이다이에 따라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를 포기하고 '격쟁' 이라 해 왕의 행차나 궁중에 직접 다가서서 구두로 직소하거나, '상언'이라 해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글을 올리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중종 15(1521) 830, 상언의 폐단을 지적하며 신문고 제도를 활성화하자는 신하들의 의견과 그에 대한 중종의 답변을 들어보자.

듣건대 임금의 가마 앞에서 읍소하는 자가 아주 많아 때로는 고개를 넘어서 따라가는 자까지 있다 합니다. 재상의 행차일지라도 사람들이 피해야 하는데, 더구나 임금이 지나는 곳에서 어찌 그처럼 외치며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듣기에 아주 한심합니다. 이제 신문고를 두는 법을 다시 쓰고 가마 앞에서 읍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다.

가마 앞에서 읍소하는 자를 모두 금하면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그 길이 없어질 것이며, 그래서 신문고를 자주 치게 되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가면서 가마 앞에서 읍소하는 일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워져 갔다. 1642514일의 인조실록을 보자. 왕에게 대사헌 이식이 아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문고의 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고 왕 앞에서 상언하는 것도 일정한 법이 있으며, 벌을 받을 각오로 징을 쳐 호소하는 일은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불시에 행행(行幸 :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일)해 가마를 멈추고 상언을 받는 규례가 있을 뿐인데 이제는 행행도 폐지했습니다. 어질고 거룩하신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도 아랫 사람의 충정이 이렇게까지 억눌리고 막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절차를 밟아 말이나 글로써 자신의 원통함을 하소연할 길은 차츰 없어지고 그 멍울은 속으로 깊어 갔다. 1607년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1626년 경상도 의성에서, 1653년 경상도 상주에서, 1671년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문고를 두드리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민원실의 문을 두드리는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청와대 민원실의 존재가 그렇듯이, 신문고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과연 교과서에서 자랑할만한 일인가? 신문고와 청와대 민원실의 존재는 억울한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나마 그 신문고조차 치기 힘들었으니 민란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노회찬, 일빛, 2004. 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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