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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이야기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 이야기,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

by 길찾기91 202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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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낙안면 신전마을 이야기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에는 추석이 없다. '떼제사'로 하면서 지낼 뿐이다. 그것도 70년간!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대다수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여순민중항쟁은 19481019일 밤부터 시작하여 1027, 그러니까 8일만에 여수시가 불타면서 일단 진압되었으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로 피신하여 저항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공비"빨갱이"빨치산이니 "반란군이니 하는 말로 불렀다. 따라서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큰 산 아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기념으로 지리산입산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66개월 동안 (정확하게는 1948. 10. 19~1955. 4. 1, 65개월 13) 쌩피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낮에는 토벌군의 총에 죽고 밤에는 산사람의 위협에 시달리고......

 

자아! 신전마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여순민중항쟁이 발발한 다음해, 추석 다음날이었다. 신전마을은 본시 아주 평화로운, 넓은 논을 가진 32가호의 순결한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산사람들이 14살짜리 연락병 노릇을 하던 소년을 데리고 왔다.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총상을 입은 소년을 치료해달라고 산사람들이 부탁하는 것이다. 인심이 순후한 시골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어쩌다 불우하게 된 자기 자식 같은 아이가 피를 흘리는데 도와주지 않을 리 없다. 이들 동네사람들은 그 아이를 성심껏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새옷을 입혀주고 따스한 솜이불에 재웠다. 이 아이는 곧 건강을 회복하고 명랑하게 동네아이들과 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산통이었다. 고립된 농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당연히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웃사이더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좀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화가 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우리 무리들을 데려와서 가만두지 않겠다!”

이때 이곳을 지나가던 면서기가 이 말을 들은 것이 모든 비극의 발단이었다.

"우리 무리들이라구?"

앞뒤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 맹꽁이 같은 면서기는 이 사실을 토벌대에게 신고했다. 토벌대는 즉각 이 소년을 체포하여 취조를 했다. 그리고 이 동네사람 전원을 추석달이 밝은 한밤중에 그 동네 한가운데 있는 큰집 큰마당에 집결시켰다(1949년 음력 817일 밤). 그리고 그 소년에게 말했다.

"이 중에서 너에게 치료해주었거나 먹을 것을 준 사람을 모두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이 소년은 자기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혜택을 베풀어준 사람들, 상처를 치료해주고 옷을 세탁해주고, 약을 사다주고, 따뜻한 쌀밥을 멕여주고, 홍시감을 주고, 누룽지를 준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가리킨다. 토벌대의 총구는 이들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2명의 생명, 3살 난 어린애부터 60세 할아버지까지 모두 한 마을사람 22명이 어처구니없는 비극 속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 그치질 않았다. 22명의 시체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휘발유를 뿌려가며 태웠다. 살인의 흔적이 사라지기는커녕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전 고을을 휘덮었다. 토벌대 군인 중에도 그러한 농촌마을 출신이 있었을 것이고, 몇몇은 이렇게 마을사람을 다 죽여서 되겠냐고 걱정하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광분한 군인들은 처마 끝마다 불을 질러 동네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마을 전체를 깡그리 태워 빈터만 남겼다고 했다.

 

토벌대 군인들이 떠난 후 살아남은 마을사람들은 우선 시신을 수습하려 해도 시신을 분별할 수 없어, 가락지나 비녀 등의 특징으로 겨우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묻으려 해도 동네가 모조리 불타 삽 한 자루가 없었다고 했다. 이웃 동네사람들이 와서 일단 시신을 묻어주었다고 했다.

 

홍동호라는 신전마을 사람은 당시 7살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을 다 잃었다. 이장 장흥석씨 말로는 그 동생이 자기와 동갑인 3살이었다고 했다. 홍동호는 그 뒤로 할 것이라고는 거지생활밖에는 없었다.

 

이들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 끔찍한 연좌제에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빨갱이라는 영원히 뗄 수 없는 딱지가 모든 계보에 붙는 것이다. 홍동호는 크면서 쓰레기 줍는 넝마주이 노릇을 했다. 청년기 때 도저히 헤쳐나갈 길이 막막하여, 내가 도대체 뭘 바라보고 살 것이냐 하고 자살을 3번이나 시도했다. 그런데 3번 다 위기 직전에 등산객이 구해주었다고 했다. 결국 몸이 아파 골골 하다가 몇 년 전에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통나무, 2019. 10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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